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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이웃여수 365섬, 바다사람들 이야기
역사·전통·자연·사람이 공존하는 섬 ‘여수 손죽도’[여수 365섬, 바다사람들 이야기 – 손죽도②] “외로운 병사 힘 다해 끝나는 인생 슬프다”
마재일 기자  |  killout13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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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14  11: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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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 장군 동상.

손죽도는 호국과 충절의 섬
이대원 장군 손죽도 해상서
왜구와 싸우다 장렬히 전사

화전놀이로 전통문화 계승
선사유적 신석기 조개더미

비경, 신이 빚은 예술품
편안한 고향 같은 휴식처

해 저무는 진중에 왜군이 바다건너와
외로운 병사 힘 다해 끝나는 인생 슬프다
나라와 어버이 은혜 갚지 못해
원한이 구름에 엉켜 풀길이 없네.

임진왜란 5년 전인 1587년(선조 20년) 2월 17일 손죽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와 전라좌수군이 벌인 전투에서 전사한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이 속적삼을 벗어 손가락을 깨물어 쓴 절명시이다.

왜구들은 남해안, 특히 군사요충지인 고흥 1관4포 지역을 자주 공략했다. 이대원 장군은 왜구들이 백성들을 자주 괴롭히자 그들과 일전(손죽도 해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고 적장을 사로잡아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심암(沈巖)에게 넘겼다. 그러나 전공을 자기 것으로 하자는 전라좌수사 심암의 부탁을 거절하는 바람에 그의 미움을 샀다.

패전에 앙심을 품은 왜구는 대규모 2차 해전을 준비해 손죽도에 또다시 쳐들어왔다. 이대원 장군에 대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던 전라좌수사 심암은 단지 병사 100여명을 이대원 장군에게 주어 싸우도록 명했다. 명령을 받은 장군은 지원군 없이 출전해 3일간 싸우다 중과부적(衆寡不敵·적은 수효로는 많은 수효에 대적하기 어려움.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전투 상황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으로 장렬히 전사한다.

   
이대원 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렬사(오른쪽)와 효자비(왼쪽).

절명시를 부하(손대남)에게 전하고 나서 적의 포로가 됐지만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적을 꾸짖었다고 한다. 끝내 항복을 하지 않자 적군은 저희 배 돛대에다 매달아 참혹하게 칼로 찔러 절명케 했는데 끝까지 적을 나무라는 그의 호령소리는 손죽도 바다 위를 쩌렁쩌렁 울려 펴졌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아들 화곡(華谷) 정기명(鄭起溟)은 전라좌수사 심암의 잘못과 이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녹도가(鹿島歌)’를 지었다. 녹도가는 이 장군을 추모하는 시와 노래 중 가장 먼저 지어진 문학 작품이다.

싸움이 끝난 후 손죽도 주민들은 해안가에 밀려온 장군과 병사들의 시신을 섬에 고이 묻고, 지금까지도 넋을 기리며 제를 지내왔다. 이 장군 묘 바로 앞에는 전사한 수군들의 무덤자리라고 알려진 무구장터가 있다.

1990년 경기도 평택에 사는 이 장군의 11대 후손들이 손죽도에 이대원 장군의 묘를 썼고, 음력 3월3일 이대원 장군 숭모제(崇慕祭)를 올리고 있다. 제향 행사에는 평택이씨 종친회와 마을 주민, 향우회원까지 참여해 우국의 넋을 기린다. 올해는 5월 2일 ‘손죽인의 날’을 맞아 마을 입구 선착장에 이대원 장군의 동상을 세웠다.

   
주민 박봉희 씨가 이대원 장군 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 역대 가장 젊은 나이 21살 때 녹도만호가 된 이 장군은 1587년 전라남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됐으나 교지를 받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22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장군은 사후 병조참판으로 특진하게 된다.

손죽도에는 이 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렬사와 효자비, 열녀비가 있어 우국충절과 효를 덕목으로 살아온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고흥군 녹동에 쌍충사(雙忠祠)와 여수시 남산동에 영당(影堂, 이순신·이대원·정운·최영 장군 화상이 모셔진 사당) 등이 있어 어업과 관계되는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지키는 장군이라고 추모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이대원 장군을 잃은 것은 ‘국가의 큰 손실’이라며 이 섬을 잃을 ‘손’(損) 큰 ‘대’(大)자를 써 ‘손대도’라 불렀다. 이후 1914년 손죽도(巽竹島)로 바뀌었다.

주민 박봉희(82) 씨는 “경기도 평택에는 이대원 장군을 모신 사당인 확충사와 신도비가 있다.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56호 지정돼 관리가 되고 있는데 손죽도의 이 장군 묘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며 “이 장군의 묘와 함께 싸운 수군들이 묻혀 있는 ‘무구장터’의 전남도나 여수시 차원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손죽인의 날’을 맞아 이민식 손죽초등학교 총동문회장이 마을 입구 선착장에 이대원 장군의 동상을 세워 기부했다.

   
 
◇ 전통문화 축제 ‘화전놀이’ 계승…‘전설과 이야기’ 구비문화 발달

손죽도는 전통문화 축제인 화전놀이를 계승해오고 있다. 손죽도는 마을이 하나 밖에 없지만 남쪽 마을 뒤에는 지지미고개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로 화전놀이가 성했다.

주로 부녀자들이 마을 뒷산 지지미고개에서 화전을 만들어 먹으면서 춤도 추고 잔치도 벌였다. 쇠판에 기름을 두르고 반죽한 찹쌀가루 위에 진달래 꽃잎을 올려 화전을 만들어 먹으면서 봄맞이 놀이를 하는 것이다. 남정네들은 풍물로 춤곡을 벌였다.

남녀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끼리끼리 먹고 마시면서 즐기다가 남정네들은 해가 질 무렵이면 농악을 울리면서 마을로 내려와 대갓집 넓은 마당에서 밤이 새도록 뒤풀이를 했다고 전해진다. 손죽도에서 화전놀이 때 부르던 대표적인 노래는 ‘제화좋소’가 있다.

   
손죽도 화전놀이 모습. 과거 음력 3월3일 삼짇날 부녀자들이 마을뒷산 지지미 고개에 모여 ‘화전(花煎)’을 만들어 먹는 등 잔치를 벌여 온데서 유래됐으며, 남자들은 풍물로 춤곡을 벌여 화전놀이를 즐기는 풍습이 성행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화전놀이를 하면서 불렀던 노래 중에 재미있는 표현을 옮겨보면

끼니도 굶고서 물애질하여, 못된 낭군 술값으로 다 들어간다.
나로도 판장에는 전깃불이 반짝, 우리 오빠 팔뚝에 금시계가 반짝
이 아래 갱번에 꿀까는 처녀야, 언제나 다 깨고 내 사랑이 될래.
저기 가는 저 큰 애기 엎으러나 지거라, 일으켜 준 채 하고 보듬어나 보자.
남남이 만나서 부부 차리고, 수십 년 뱃삭 없이 내 배를 탔네.
뱅어배 선장아 돈 자랑 말아라, 우리 낭군 내일모레 중선배 간단다.

‘진도아리랑’ 가락에 맞춰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를 반복하며 사회풍자적인 앞소리를 화전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때 여자들은 ‘화전’을 만들어 먹으면서 춤도 추며 잔치를 했다.

이처럼 손죽도 주민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들은 전설과 이야기를 고스란히 원형을 간직해 유지하고 있다. 옛날 섬사람의 생활의 단면을 전해주는 구비문화 중 다양한 노래가 많은 것이 손죽도의 특징이다.

   
1970년대 손죽도 화전놀이에 참여한 부녀자들의 기념사진. 과거 음력 3월3일 삼짇날 부녀자들이 마을뒷산 지지미 고개에 모여 ‘화전(花煎)’을 만들어 먹는 등 잔치를 벌여 온데서 유래됐으며, 남자들은 풍물로 춤곡을 벌여 화전놀이를 즐기는 풍습이 성행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선사시대 유적지 조개더미
   
선사시대 유적지 조개더미.
손죽도 선착장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해안도로를 따라 약 200m쯤 가면, 마을이 처음 시작되는 민가의 담장에 깊은 바다 속 바위에서 사는 바윗굴·소라·전복·두두럭고동 등의 조개껍질이 박혀 있는 선사문화유적지가 있다.

손죽도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토기 조각과 뼈연모가 대표적이다. 토기는 눌러찍은무늬토기, 골아가리토기, 가는선무늬토기 조각 등이 발견됐다. 동물의 뼈를 이용해 토기에 무늬를 새기던 도구의 하나인 자돌구도 발견됐다.

조개더미에서는 돌고래, 강치 등과 같은 해양 포유동물과 사슴뼈 등이 출토됐다. 이로 보아 손죽도 주민들은 활발한 어로 활동과 함께 육지에서 직선거리로 16km 떨어진 섬임에도 불구하고 수렵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손죽도는 광복 전까지 어업과 관련된 안강망이라고 하는 중선(仲船)배가 55척으로 삼산면에서 가장 많았다. 중선배 오색 풍어기 달기 마을행사가 전승되고 있다. (사진 최성환)

◇ 안강망 발달…오색 풍어기 달기 행사 전승

일본의 선진어구 도입으로 남도 수산업의 전진기지였던 손죽도는 광복 전까지 어업과 관련된 안강망이라고 하는 중선(仲船)배가 55척으로 삼산면에서 가장 많았다. 훗날 여수가 우리나라 수산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됐던 배경에는 이 시절 손죽도를 비롯한 주변 어장의 활황과 선도자들의 경험, 자본이 축적돼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중선배 오색 풍어기 달기’ 같은 마을행사가 전승되고 있으며, 가난했던 50~60년대에도 손죽도는 보릿고개가 없었으며 육지에서 배를 타려고 손죽도에 왔다고 전해진다.

◇ 식생·비경·수산물·돌담길 등 생태자원 풍부

손죽도는 삼각형 모양의 섬으로 면적은 2.92㎢, 해안선 길이 11.6㎞에 달한다. 거문도 북동쪽 40㎞ 해상에 위치하며, 손죽열도(손죽도·소거문도·광도·평도 등의 유인도와 반초섬·나무여·갈키섬·검둥여 등의 무인도로 이루어짐)의 중심 섬이다. 마을 앞에는 길이 1㎞ 정도 되는 손죽해수욕장이 있다.

손죽도는 온대 해양성 기후로 아열대 희귀식물의 서식처이며, 기후가 온화하고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이국적인 식생 경관을 나타낸다. 온대림이 무성하고 곳에 따라 아열대 식물이 자생한다.

손죽도 근해에서는 문어·삼치·방어·도미 등이 많이 잡힌다. 가사리는 손죽도 특산품이다. 가사리는 홍조식물 우뭇가사리과로 식이섬유소가 풍부하고 칼로리가 낮아 식용으로 섭취할 수 있다. 손죽도 주변 해안은 암석해안이 많아서 암초에 자생하는 자연산 돌미역이 자라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영양염류가 풍부해 미역의 맛이 뛰어나다. 손죽도의 해녀들은 매년 봄이면 깊은 바다 바위에서 자라나는 돌미역을 채취한다. 올 겨울부터는 김 양식도 시작된다.

   
손죽도 봉화산에서 바라본 마을. (사진 여수시청)

손죽도는 낚시천국으로 불릴 만큼 낚시꾼들에게 인기가 많다. 손죽열도 중 본섬인 손죽도를 중심으로 북서쪽의 무학도·목점, 동쪽으로 평도·광도, 남쪽으로 역만도까지 광범위한 지역이 포인트다. 특히 손죽도는 대표적인 낚시터로 11월까지 갯바위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섬 중앙에 솟아 있는 깃대봉(242m) 비롯해 삼각산, 봉화산 등의 산이 있다. 깃대봉은 손죽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1896년 무렵 일본이 지도 제작을 위해 측량 기점으로 산꼭대기에 기를 꽂은 이후 지어진 이름이다. 봉화산은 조선시대 왜구나 적의 침입을 주변 지역에 미리 알리기 위해 설치한 요망소가 있었던 산이다.

   
 
비례봉과 지지미를 잇는 섬의 남쪽 방향으로 해안은 100m 이상의 절벽으로 특히 이곳에는 인공림으로 방풍을 위해 조성된 곰솔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마을에는 수백 년이 넘어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마을 큰길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아주 오래된 아름다운 돌담길이 있다. 그 사이로 골목길이 이어진다. 돌담은 이끼와 담쟁이넝쿨이 돌담을 보듬고 있다. 주민들은 새마을운동 이후 바뀐 시멘트 담을 돌담길로 복원할 계획이다. 또한, 대부분의 집집마다 정원이 있고 동백꽃분재도 많다.

탐방로도 개설되고 있다. 3차 구간 중 1차는 완료됐으며, 올해 2차, 내년에 3차 구간이 완료될 계획이다.

손죽도에는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자원이 있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한 밤하늘의 별이다. 이곳에서는 도시처럼 어둠은 위험하고 빛은 안전하다는 통념이 통하지 않는다.

◇ 순우리말로 불리는 땅이름의 보고

손죽도의 땅이름에는 아름답고 순박한 토박이말이 상당수 남아 있다. 이름만 들어도 땅의 모양을 알 수 있다. 땅이름 본래의 의미를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준다. 손죽도, 거문도, 초도 등 삼산면 지역은 토박이 땅이름의 보고(寶庫)이다.

‘독 보듬고 돈디’라는 말은 손죽도에 전해 오는 지명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해안에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돌(바위)을 안고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독 보듬고 돌고 나면, ‘손잡고 돈디’를 만나게 된다. 해변의 바위절벽을 돌아가기 위해선 누군가 손을 잡아주어야만 하는 곳에 붙여진 이름이다.

‘택걸이’는 절벽이 심해 독을 보듬는 정도로는 건널 수가 없고 턱을 바윗돌에 괘고 두 손으로 바위를 붙잡고 건너는 것을 말한다.

‘깻독바’는 손죽도 서쪽 해안 중앙에 있는 바위로 바위 주변의 돌들이 검은 돌들로 이루어져 있다. 깻독은 검은돌의 사투리 표현이다.

‘처녀 배짠디’는 손죽도 중앙부 깃대봉에서 지지미로 가는 길목으로 옛날에 처녀들이 모여서 베를 짰다고 하는 곳이다.

‘날라리’는 힘든 길이 끝나고 평평하여 날아갈 듯이 편히 길을 갈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서당솔밭’은 말 그대로 손죽도에 서당이 있던 시절 서당 소유의 솔밭이다. 태풍이 오면 섬 동쪽의 큰 파도가 이곳을 넘어오자 서당 사람들이 이곳에다 소나무를 심어서 피해를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옆걸음’은 해안지역 바윗길이 좁아서 정면으로 지나갈 수가 없어 옆 걸음질로 걸어가야 하는 곳에 이름 붙여졌다. ‘들개머리’란 곳과 ‘목넘’ 지역에 이런 지형이 있어 들개머리 옆걸음과 목넘 옆걸음으로 부른다.

   
손죽향토지에 실린 손죽도 갯살림 지도. 손죽도의 땅이름에는 아름답고 순박한 토박이말이 상당수 남아 있다. 이름만 들어도 땅의 모양을 알 수 있다. 땅이름 본래의 의미를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준다.

화전놀이터가 있던 ‘지지미’ 고개는 각별하다. 손죽도는 참꽃이 만개한 삼월 삼짇날 즈음이면, 산등성이 꽃밭에서 꽃전을 부쳐 먹으며 춤과 노래를 부르며 축제를 벌였다.

주민 강강희(102) 할머니는 “산등성이 화전(花田)에서 일주일 이상 밤낮을 쉬지 않고 화전놀이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지나던 배가 바위 사이에 끼인 사건이 있었던지 ‘배 찡긴디’가 있고, 바위 위를 지나면 덜걱거리는 소리가 나서 ‘덜걱더리’라 했다. 곧게 뻗은 길이 길게 이어지는 곳은 ‘진걸음’, 물이 내려오는 골짜기는 ‘물래골’, 산중턱을 돌아 내려가는 곳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내려닿는 디’라고 부른다.

배를 내리자마자 만난 땅이름이 ‘배 댄머리’, 마을 앞 해변은 ‘집앞’이라 불렀다. 물이 말라있는 해변을 가리키는 ‘보튼기미’는 손죽마을 북쪽 해변이다. 긴 자갈밭은 ‘진짝지’라 부른다. 

   
 손죽해수욕장.
   
 이대원 장군 묘 앞에서 바라본 손죽도 앞 바다. 우거진 풀숲이 이대원 장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군사들의 무덤인 무구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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