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신문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는 서서히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그 불편을 얘기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과거에는 그렇게 얘기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만 이제 그 간섭이 불편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불편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꾸 바꿀 것을 강요받는데서 시작된다.
그중에는 하는 일이 나쁘니까 바꾸자는 것도 있겠지만, 이렇게 하면 더 나을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너무 집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부패의 본질적 특성은 무엇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패의 원천은 견제 받지 않은 권력에서 시작된다. 권력은 대체로 부패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또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정치인과 공무원에서부터 여타 사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모든 세력에 이르기까지 견제 받지 않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부패는 그곳에서 쉽게 뿌리내릴 개연성이 충분하다 할 것이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하지 못할 때, 누군가 턱을 치켜들고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대거리를 해댈 때, 대개의 반응은 이렇다. “네까짓 것이 감히?” 기분 나쁘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 신문이 딱 그런 꼴이다. 그래서 기득권층으로부터 적지 않은 미움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변화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된다고 믿는다.

황하가 동쪽의 황해에 이르기까지 만 번도 더 곡류를 하지만 결국 황해에 이른다. 이것을 ‘萬必曲東’이라 한다. 이 곡류를 조금이라도 줄여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 지역이 필요 이상의 고통을, 불필요하게 오랫동안 감내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우리 신문이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우리 신문은 비록 힘은 없어도, 쉼 없이 권력자들에게 대거리를 해댄다. 검은 구름을 걷어내야 밝은 빛이 보이기 때문이다.

검은 구름을 걷어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투명성이다. 우리 신문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한가지다. “보여 달라!”
없는 사실을 가르쳐 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이 소박한 요구가 거절당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떳떳한 사람들은 하는 일에 어둠이 없다. 그러나 떳떳치 못한 사람들이 하는 일에는 보여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어둠이 많다.
그 어둠을 제거하는 일. 그것은 곧 “그 어둠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누군가의 외침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그리도 힘이 드는가 보다.

세상일에 사사건건 딴죽 걸고 참견한다는 것은 힘들고 지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또 기득권층과 권력에 맞서 싸우기란 무모할 정도로 힘든 일이다. 더구나 집단의 압력과 제재를 받을 때면 깊은 회의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혹은 우리 신문사의 기자들을 세상물정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이 사회에 딴죽 걸고 도전하는 걸까?

비판받는 사람이나 집단의 반발과 역공격이 얼마나 거센 줄 알면서 왜 계란으로 바위를 치기를 계속하려는 걸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느냐?”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그러나 언론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비판도 예상도 경고도 하지 못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 몫으로 남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글로써 이 땅의 모든 부정이 퇴치될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한 로맨티스트가 아니다. 인류 역사상 글로써 세상을 개혁하고 바꾼 적은 없기 때문이다.

세계박람회를 앞두고 앞만 보고 달려도 시원치 않을 이때에 왜 과거문제를 거들먹거리며, 사사건건 시비를 거느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나는 과거의 치마를 들어 올려 볼 수밖에 없다. 치부는 부끄러움과 반성을 전제로 할 때만이 공개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영원히 파묻히는 것이라면 뭘 부끄러워하고 반성할 것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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