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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정체성 확립의 시작은 ‘기록’기억 하지 않는 도시는 미래가 없다(중-1) 후대에 도시정체성과 정신을 드러내는 역사적인 기록물 될 것
마재일 기자  |  killout13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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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27  09: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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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경관 3년 또는 5년 단위로 변화상 기록해야
산단 들어서면서 삼일·중흥지역 마을 사라졌지만
기록물 시스템 없어…자료수집 등 기록화 시급

우리나라는 근대화의 진행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도시의 외형도 짐작이 어려울 정도로 급변했다. 여수도 국가산단 조성과 박람회 개최, 관광시설 확충, 택지개발 등으로 그 변화의 속도가 빠른 도시에 속한다. 이제는 몇 년 전의 모습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이 변했고, 그리고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특히 대규모 국가산단이 들어선 여수시 중흥·삼일지역처럼 마을이 사라지는 아픔을 간직한 이주민들은 다시는 되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타지로 떠난 이주민들이 여수에 와도 고향 마을처럼 단 하루도 편히 쉴 공간이 없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은 사라지고 있다. 지난 2004년부터 조성 중인 웅천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모전과 웅동·웅서·송현 마을은 사라졌다. 양지·소정·평지·신죽·죽림 마을이 있었던 미평은 선경·주공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옛 마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마을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구 여천시에 있는 거북선공원 입구에는 ‘우리들의 고향-용기·건천·부등 마을’ 표지석이 있다.

   
▲ 거북선공원 입구에 세워진 ‘우리들의 고향-용기·건천·부등 마을’ 표지석.

이처럼 자손 대대가 살아오던 삶의 터전이 사라졌지만 언제 어디서나 접근이 가능한 고향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 기록이 없어 이제는 주민들의 머릿속으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이마저도 세월에 흐릿한 추억이 되고 있다.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을 수 있지만 접근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도시 경관 뿐만 아니라 마을과 주민들에 대한 사진·영상 기록은 문서(글)와 함께 여수의 역사가 된다. 이는 도시 정책 자료와 이미지 홍보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 후대에 도시 정체성과 정신을 드러내는 역사적인 기록물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빼어난 자연 경관이나 문화재는 훼손될 경우 복원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기록화 작업은 더욱 절실해진다.

경관 기록의 경우 3년 또는 5년 일정 기간 같은 장소에서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면 수십 년, 수백 년 후에도 도시의 변화된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도시 경관을 유형과 축별로 나누고, 도로·강변·해안·산 등으로 구분해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대규모 경관과 경관축 등은 헬리캠(helicam, Helicopter+Camera)으로 항공 촬영해 더욱 사실적이고 현장감 있는 기록을 남길 수 있다.

문화·산업·미술·인물 등 기록 작업도 서둘러야
경관 기록화와 함께 여수의 역사, 문화, 관광, 산업, 미술, 인물 등 지역 전반에 대한 문자·사진·영상 기록 작업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에 앞서 가장 중요한 원천 소스인 여수 관련 사료(史料) 확보가 최우선 선행돼야 한다.

지역 향토사학계에서는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굵직굵직한 사건과 관리 부실로 인해 지역의 소중한 사료들 상당수가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사라진 사료에 대한 소재 파악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다.

정유재란 때 전라좌수영성이 불탔고, 동학농민운동 때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향리(고려·조선 시대에 지방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최하위 관리를 통합해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들이 동학도라는 이름으로 처형을 당하거나 지역을 떠나면서 많은 자료와 기록물이 유실되거나 이들이 가져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여순사건이 지역에 미친 영향은 크다. 많은 이들이 희생을 당하고 시가지가 불에 타면서 적지 않은 기록물들이 사라진 것으로 역시 추정하고 있다.

   
▲ 여순사건 때 불에 타고 있는 여수 도심을 아이를 안은 한 여인이 바라보고 있다.

관리 부실도 한몫했다. 1998년 여수시·여천시·여천군이 통합할 당시 짧은 기간에 통합이 추진되다보니 3개 시·군의 기록물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신경을 쓰는 부서도, 공무원도 없었던 탓에 현재 없어진 자료가 얼마나 되는지, 어디로 갔는지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주석봉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당시 사료적인 가치가 있는지를 따질만한 역량을 갖춘 공무원이 없었을 뿐더러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전하는 작업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한 공무원이 없었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고 지적했다.

여수시문화원에 규장각에서 복사해온 지역 사료가 있지만 일부만 번역됐을 뿐 나머지는 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번역작업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옛 여수, 여천시, 여천군 문화원이 통합하는 과정에서 관련 인사들이 기록물을 가져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소재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 여순사건과 도서지역 문화자원을 발굴·기록화해 온 것이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민간단체나 개인이 자비를 들여 지역의 사료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작업과 시가 소규모 예산으로 발주하는 용역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

   
▲ 여순사건 때 불에 타 폐허가 된 여수 도심.

주석봉 선임연구원은 “성과가 곧바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어서 중장기적으로 지속적인 예산과 인력 투입이 뒷받침돼야 한다. 여수시의 학예연구사 활용은 물론 민간단체에 장기 용역을 줘서라도 기록화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시장이 바뀔 때마다 정책 기조가 통째로 흔들리거나 담당 공무원에 따라 업무 비중이 달라지는 상황에서는 성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이와 함께 주 선임연구원은 “현재 나이가 70세 이상 되는 지역 어르신들이 세상을 뜨게 되면 전통문화는 거의 대부분 단절될 우려가 크다”며 “하루속히 채록(이야기나 노래 따위의 자료를 찾아서 모아 적거나 녹음함) 해서 기록이 없던 시대를 보완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 선임연구원은 “채록한 것을 날 것 그대로 기록할 수 없다. 크로스체크를 통해 사실 확인 작업을 거친 후, 데이터를 가공해 정보를 만들어 간행물과 디지털화하는 과정을 거치는 만큼 시간과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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