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 자극적인 내용들이 많아서 고발당하기 일보 직전이다. 계속 이렇게 나가다가는 결국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잡힐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잡힐 때 잡히더라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겠다는 애초의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글을 쓰면서 글 쓰는 나도 당황스러운데, 당하는 사람이야 오죽 당황스러울까 싶으니 미안한 마음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 신문이 존속하는 한, 누구에게도 굽히는 일을 절대 없을 것이다.

여러 번 언급을 하였지만 우리 신문은 여러 꼭지를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하나를 잡아도 제대로 잡아, 일주일이 걸리든 이주일이 걸리든, 처음과 끝을 명확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독자들에게 “뭔 말인지 알지?”를 외쳐야 그나마 돈을 내고 신문을 보는 독자들에게 덜 미안하기 때문이다.

신문이란 이렇게 들쑤실수록 강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언론 밥을 먹고서야 알았다. 힘이 있는 사람의 말일수록 의심하면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언론의 삐딱한 기질이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다고 믿는다.

싸움이 없는 평화로움을 언론은 지극히 싫어한다. 그래서 싸움이 있는 곳에는 항상 언론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없다면 오히려 싸움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언론의 지극히 못된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싸울 일(?) 이 많은데 요즘 이런 저런 청탁의 전화들이 많이 온다. 과거에는 하나같이 들어줬던 부탁들도 지금은 하나같이 거절을 한다. 지금 당장은, 누구에게도 빚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어떤 민원을 해결하려면 개인적인 줄과 백을 동원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습관들이 있다. 개인적인 일이면 줄과 백을 동원하고, 집단적인 일이면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나선다. 누가 더 세게, 누가 더 오래 우느냐에 따라 그 해결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시위 하나를 보더라도 한결같이 극단적인 표현들이 총 동원된다. 요즘 시청 앞 광장과 시청 앞 잔디밭에 가면 자주 목격하는 일이다. 그 시위 하나하나에서 비춰지는 단어는 딱 하나다. “뭔 말인지 알지?”

우리 신문도 마찬가지다. 일주일에 12면의 지면을 다 채우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자니 자연 쓰기 쉬운 기사에 의지하게 된다.
쓰기 쉬운 기사를 그대로 옮겨 쓰면 그것은 신문이 아니라 이미 '홍보전단지'가 된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은 ‘홍보전단지’가 아니라 숨은 의도를 밝히는 '삐라'가 되는 길을 원한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와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순수히 독자들의 몫이다. 신문은 이렇게 대체적으로 야당이고, 기자들은 언제나 감춰진 곳을 들춘다. 날을 세우지 않은 기사를 싱거워하는 것이 오늘날 독자들의 수준이다.

신문 기사를 대충 대충 얼버무리면서 독자들에게 "뭔 말인지 알지?"를 외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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