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완규 발행인
얼마 전 어느 기업 공장장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곧 은퇴를 해야 할 나이가 되었는데 은퇴를 하고 나면 고향으로 가고 싶어도 고향을 떠난 지가 30년이 넘다 보니 이제 그곳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수에 살자니 여기도 객지인지라 마음 붙이기가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고향에서 나고 자라서 지금껏 고향을 지키며 사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으나 함께 웃고, 함께 놀고, 함께 지낼 사람이 없으니 그 고향이 그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이가 들어서도 고향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지금껏 고향을 지키면서 고향이 변해가는 것을 줄곧 지켜보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고향마을이 지금처럼 변하기 전에는 고향마을의 뒷산에 오르면 그 때의 노을이 얼마나 붉었는지도 알고 있고, 마을 앞 개울에는 얼마나 많은 붕어와 가재들이 살고 있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람회장이 들어선 신항에는 얼마나 많은 외항선들이 드나들었는지도 알고 있고,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휘두르며 하늘의 별이라도 딸 것 같았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나서 얼마나 초라한 모습으로 사라지는지도 보고 자랐습니다.

돌담에 초가지붕이었던 정겨운 고향마을이 아파트 단지로 변해가는 장면도 지켜봤고, 어렸을 때 날마다 헤엄치고 놀았던 신항이 거대한 박람회장으로 변해가는 것도 지켜봤습니다.

지금도 어느 골목 어느 귀퉁이를 지나더라도 이곳에는 과거에 무엇이 있었고, 저기에는 어떤 가게들이 있었는지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기억을 지금껏 소중히 안고 사는 저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50년이 넘도록 지금껏 고향을 지키면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고향을 지키면서 살게 될 것이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도 어디에 가든 절반은 아는 사람이고, 어느 길을 가든 모두가 손금 보듯이 아는 길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고, 어디에 가면 어떤 사람이 있고, 어디에 가면 어떤 문제가 있고, 어디에 가면 맛있는 것이 있고, 어디에 가면 볼만한 것이 있고, 어디에 가면 아픈 기억이 있고, 어디에 가면 기쁜 기억이 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고향의 아픔을 알고, 고픔을 알고, 슬픔을 알고,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플 때면 걱정스런 얼굴로 뛰어 오는 사람이 있고, 배고프다고 하면 같이 밥 먹자고 하는 사람이 있고, 술 고프다 하면 한 잔 하자며 손을 내미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외로울 새도 없고 한가할 새도 없습니다. 이러한 것이 고향에 사는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분은 저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주변에 어렵게 사는 어르신들도 많은데 왜 당신은 아이들에게만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느냐?”고 물었습니다.

요즘 제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어려운 아이들과 관련된 일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질문에 저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저도 한 때는 가난한 아이였다고. 그래서 한 때는 그 가난을 몹시 원망했던 적도 있었다고.

내가 경험해 보니 아이들의 가난은 어른들의 가난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어른들의 가난은 어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이들의 가난은 아이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갖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그 가난은 대개 부모에 의해서 갖고 태어나는데, 그래서 아이는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서 가난한 아이로 태어날 수도 있고 부유한 아이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아이의 가난은 아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가 책임질 일도 아니라고.

내가 경험을 해보니 어른들의 가난은 그것을 구제하는데 많은 노력과 힘이 필요하지만, 아이들의 가난은 곁에 있는 어른들이 조금만 거들어 주면 의외로 쉽게 아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일어난 아이는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꿈,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라고. 그래서 아이들의 가난은 그 아이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아이들의 가난만큼은 절대 외면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도울 때는 사람이 되었든 기업이 되었든, 생색을 내거나 빠른 응답이 오기를 바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를 돕는 일은 콩나물에 물을 주는 것처럼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콩나물에 물을 줄 때마다 그 물이 모두 밑으로 새어버리는 것 같지만 그 물을 먹고 콩나물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에게 꾸준히 물을 주다보면 새어 나가는 그 물을 먹고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돕는다는 일은 5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며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이들을 돕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많은 사람들은 이 일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행복한 도시가 좋은 도시이고,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도시, 우리나라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아이들이 행복한 도시이고,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입니까?

혹시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품어야 할 꿈과 희망을 오히려 뺏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른들이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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