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권과 예산권 오남용해 권한 사유화 ‘결국 시민 피해’
모든 정책결정과정 투명하게, 사회적합의 도출 과정 필수

▲ 마재일 기자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되어 있다’라는 말이 있다.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하나는 좋은 뜻으로 잘하려고 했지만 결과가 나쁘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의도로 나쁜 짓을 하고도 겉으로는 좋은 뜻인 양 위장했다는 것이다. 결과는 둘 다 좋지 않지만 하나는 의도만은 좋았던 것, 다른 하나는 의도마저 불순했던 것이다.

국정농단 실상이 드러나면서 대한민국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최순실씨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신의(信義)로 뭔가 (박근혜 대통령을)도와주고 싶었다”고 한 해명은 ‘좋은 뜻으로 잘하려고 했는데 결과가 나쁘게 되었다’이거나 ‘나쁜 의도로 나쁜 짓을 하고도 겉으로는 좋은 뜻인 양 위장했다’ 중 하나일 것이다.

정부나 자치단체의 정책은 아무리 결과가 나빠도 애초 표방한 명분은 항상 좋다. 설사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의도만은 선했다면 그나마 너그러워 질 수 있지만 의도마저 나빴다면 가차 없는 비판은 물론 정신적·물적 피해는 오로지 국민과 지역민 몫으로 남게 된다. 문제는 의도의 진위를 웬만해선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불순한 의도를 선의로 포장하기 때문에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단체장의 정책 결정 과정은 그래서 중요하다. 시장·군수 등 단체장 비리는 개인의 도덕적 해이에 있지만 제왕적 권한에 기인한다. 인사권과 예산권을 바탕으로 사실상 견제 받지 않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단체장은 주차 단속, 음식점 위생검사 같은 생활밀착형 지도·단속 권한부터 아파트 신축 허가나 공원 조성 등 건설건축 관련 인허가권까지 매우 많다. 지역개발 권한도 상당 부분 갖고 있다. 게다가 행정 내부적으로 예산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자신의 권한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 여수시의 지난해 살림규모는 1조2181억 원이다. 이 중에는 법정의무사업비 등 경직성 경비가 훨씬 많지만 시장이 재량으로 수행할 수 있는 예산도 수백억에 이른다.

시장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버팀목으로는 예산권보다 인사권이다. 여수시장의 경우 2000명이 넘는 공무원의 인사권을 행사한다. 한 번 당선되면 4년간 인사권을 갖는다. 재선이면 8년, 3선이면 12년간 인사권을 갖는다. 소속 공무원 입장에서는 시장에게 절대 충성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흔히 시장, 군수 등 단체장을 ‘소통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단체장이 지역에서 누리는 권한을 제대로 평가하자면 ‘소황제’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하다. 단체장들이 무리한 개발사업과 어처구니없는 낭비 사업을 그토록 많이 벌이는 데는 견제 없는 막강한 권한 탓이 크다. 견제 없는 권한은 낭비뿐만 아니라 비리도 부르기 마련이다.

단체장은 선거법상 피선거권을 상실할 정도가 아니라면 4년 임기를 보장받기 때문에 금품 청탁과 로비가 집중된다. 선거 과정에서 막대한 선거자금이 필요한 선출직 단체장들에겐 떨칠 수 없는 유혹이다. 선거 조직을 유지하고, 다음 선거를 치르기 위해 엉뚱한 곳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수시민은 이미 민선4기 때 비리로 인해 무너지는 권력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오현섭 전 시장이 추진한 각종 사업이 의도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결국 비리가 들통 나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한 도시의 수장인 시장이 사법 처리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가장 큰 문제는 지역민들이 감당해야 하는 자괴감이다. 자신들 손으로 뽑은 시장이 구속됨으로써 지역 이미지는 덩달아 추락한다. 아울러 오현섭 전 시장의 비리에 연루돼 의원직을 상실한 시·도의원 사태도 지역민들의 자존심을 크게 훼손했다. 도시 이미지 추락은 물론 재선거에 따른 세금 투입은 보다 현실적인 부담이다. 가뜩이나 쓸 곳도 많은데 엉뚱한 곳에 돈을 써야하니 분통 터진다. 잦은 선거 때문에 주민들끼리 편을 갈라 대립하고 갈등하는 이전투구는 말할 것도 없다.

최순실 국정농단·재단 비리 의혹은 비선 실세의 위세 앞에 국가의 공조직이 참으로 비루하고 허약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아무런 지위도 직함도 권한도 없는 비선실세가 사유화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권력은 사회봉사나 공익이 아니라 ‘부리는 힘’ 즉 갑질하는 힘으로 인식된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것 자체가 갑 중의 갑일 수 있는데 그 갑 위에 갑이 또 있었다는 것이다. “박대변인(박근혜) 사퇴하고 최대통령(최순실) 하야하라”는 구호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기형적으로 비대한 권한은 각종 비리를 싹트게 한다. 부당한 권한 행사는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의 지방 도시에서도 발견된다. 공무원들도 단체장 지시에 따라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원칙을 지키는 행정이라며 뚜렷한 이유 없이 민원을 늑장 처리하거나 묵살하다 시장의 말 한마디에 신속하게 처리되는 민원도 많다.

또, 단체장이나 공무원이 단체 통제 수단으로 곧잘 악용하는 갑질 횡포가 보조금이다. 시에 비판적이거나 시장 선거 때 상대 후보를 지지했다는 이유 등으로 정당한 사유 없이 보조금을 삭감하거나 배제시키는 경우도 있다.

근래에 들어 객관성과 투명성 등을 이유로 공모 형태를 취하는 여수시 사업이 늘고 있지만 사실상 알음알음 인맥과 시에 밉보인(?) 단체는 소외 받거나 제외되고 있다는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접하곤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시민이 낸 세금을 공평하게 나눠서 잘 쓰라고 한 것인데 사유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장과 공무원, 여기에 시의원은 시민 대리인일 뿐이다. 먹고 살기 바쁘니까 세금으로 급여를 주면서 행정을 잘해 달라고 맡긴 것이다. 더욱이 주철현 여수시장의 구호(캐치프레이즈)도 ‘시민 여러분이 시장입니다’이다. 곧 시민이 주인인 것이다. 주인-대리인 문제는 국가나 도시든 아파트 관리든 어느 조직에서나 발생한다. 어느 조직에서건 대리인이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설계되고 운영되는 조직은 번성하고, 대리인이 본인 이익을 우선 챙기게끔 짜이고 움직이는 조직은 망하기 십상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한 여인네에게 위임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사단이 났다.

이렇듯 국민이, 시민이 위임한 권한을 오남용(誤濫用)하고 대리인이라는 것을 망각한다는 게 문제다. 다수로부터 위임 받은 권한을 소수가 자신들 이익만 챙기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대리인들이 딴 짓을 못하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는 무엇일까. 바로 투명한 정보 공개다. 대리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주인이 파악하고 있다면 주인 몰래 제 이득을 챙기기는 힘들다.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면 시장과 공무원, 시의원이 딴 짓을 할 수는 있는 기회를 그나마 최소화할 수 있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갑질 횡포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시민은 못 미더워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

행정 문제의 본질과 처방은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 그리고 시민 의사가 고르게 반영되는 정책결정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여수 웅천 한화 꿈에그린 아파트가 애초 7층 제한에서 29층으로 도시관리계획이 변경된 과정과 분양가에 지반 공사비를 포함한 경위 등에 대해 특혜 의혹을 제기한 여수시의회 송하진 의원은 여수시에서 제출 받은 자료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송 의원은 여수시가 의혹 투성이인 일련의 과정을 ‘위원회의 결정’이라는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하고 있으며, 결정 과정에 있어 시민 여론 수렴과 합의도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스웨덴 쇠데르텐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최연혁 박사는 저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를 통해 25년간 스웨덴 생활의 경험들을 나눠주며, 대한민국의 미래 모델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여수시에도 적용된다.

“스웨덴에서는 모든 정책을 결정할 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충분한 사회적인 합의를 거친다고 한다. 독일과 유사한 ‘공동 결정제’ 덕분이다. 정책 결정에 영향을 주고받을 모든 집단의 소속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절충안을 찾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기에 정책이 통과하는 데만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겉으로 보면 꼭 멈춰버린 나라 같기도 하다. 그러나 수많은 이익집단의 합의와 절충, 차후에 일어날 문제에 대한 충분한 예상과 검토는 더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상식적인 해법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자 결과다. 스웨덴이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도, 또 많은 난민이 이주해 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배경에는 바로 이런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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