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를 읽으며 충무공을 찾아 나서다 10

“아침에 조이립을 전송하고 객사 대청마루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서문 밖의 해자와 성벽을 더 올려 쌓는 곳을 순시했다.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성실하지 못하므로 책임자를 매로 다스렸다.”

임진년(1592년) 4월 15일 일기다. 돌 줍는 작은 일도 게을리 하지 말고 견고하게 성벽을 쌓으라 하시는 장군의 모습이 환히 보인다.

▲ 여수 방답진성 여수시 돌산읍 방답길 36-16에는 우리 수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은 방답진성이 있다. 하지만 방답진성은 너무 허름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돌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송서연

여수 방답은 지금의 돌산도(突山島)를 가리키는데, 외적이 침입해 들어오는 길목이기에 첨사를 책임자로 하여 돌로 성을 쌓았다 한다. 방답진성은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과 함께 돌산도의 최남단인 군내리에 설치되어 최일선에서 왜구를 막아내던 성이었다. 왜구 방어의 요충지였던 셈이다.

‘사드’를 둘러싸고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그중에 특히 성주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다. 전문가의 식견이 없어서 사드 배치가 꼭 필요한 건지, 필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밀어붙여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성을 쌓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돌 줍는 일’에서부터 ‘돌 쌓는 일’까지 국민들의 협조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방답진성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피난민에게 곡식씨앗까지 마련해 주고 들어가 경작하면서 거주하게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안보’의 진정한 길을 장군께서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여수충무고 학생동아리 ‘이순신연구소’ 박인화, 홍지원, 송서연, 김윤식, 정승화, 서지희. 대표집필 송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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