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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울타리를 뛰어넘은 삶, 이순신에게 길을 묻다”‘이순신-여천로’를 순례하며 효(孝)를 만나다.
젊은 기자들 8기 특별취재반  |  yspak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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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07  15: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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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은 유생 출신의 의병장이었습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13도의병연합부대의 총대장이 되어 전국의 의병을 모아 서울진공작전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버지의 부음을 듣게 되었고, 이인영은 목 놓아 통곡하더니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며 군사장 허위에게 군무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후에 여러 차례 의병들이 찾아가 다시 나설 것을 권했으나, 삼년상을 마친 뒤 나서겠다면서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의병부대는 일본군에게 패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말기의 국내의병운동에 마침표를 찍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유교사상은 층과 효 두 덕목을 추구하되, 이러한 두 가치가 충돌할 경우에는 효를 먼저 행하는 것이 법도였습니다.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도리인 효를 실천하는 것이 사회적 인간으로서 도리인 충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욱 본질적인 것이라고 판단하여, 효를 실천하지 못하는 자가 충을 실천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시대의 이단아’가 있습니다. 이순신입니다. 당쟁의 희생양과 선조의 질투로 파직되어 옥에 갇혔다가 다시 풀려나 얼마지 않아 이순신은, 그 엄혹한 상황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상을 치른 지 고작 3일 후, 나라를 구하겠다며 종군 길에 올랐습니다.

어머니를 여읜 슬픔이 크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유년(1597) 4월 16일의 난중일기입니다. “궂은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며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 (뒷날에 적다.)” 오죽하였으면 장군이 ‘죽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을까 싶습니다. 이순신은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라의 부름에 응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장군은 전장에서 나라를 구하고 죽었습니다.

유학의 나라인 조선의 지식인인 이순신은 왜 그랬을까, 그것이 알고 싶어서 여순신-여천로의 순례를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설령 그 의문에 대한 속 시원한 해답을 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길을 떠나며 내내 그 문제를 화두로 삼으면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무엇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말입니다.

-‘젊은기자들’ 8기 특별취재반 ‘이순신-여수로’ 대표기자 이혜인
 

   
▲ 이순신-여천로. ‘자당지―(약 1.2km, 도보 약 20분)→이순신공원―(약 1.5km, 도보 약 25분)→오충사―(약 2.5km, 도보 약 40분)→거북선공원―(약 1.0km, 도보 약 15분)→선소―(약 10.4km, 도보 약 2시간 40분)→흥국사’ 총거리 약 16.6km, 도보 4시간 20분. ⓒ이보겸

“이순신의 효심이 깃들어 있는 곳, 이충무공 자당 기거지”

   
▲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 이충무공 자당 기거지(慈堂起居地)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어머니 초계 변씨를 모신 곳이자 이충무공 휘하 정대수 장군의 집터입니다. 2013년 6월 24일 여수시 지정 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는데, 현재 건물은 2015년 신축된 것입니다. ⓒ정명규

이순신은 1592년(선조 25)부터 약 4년 8개월 동안 어머니 초계 변씨와 아내 방씨 등 가족들을 전라좌수영 내 송현마을에 모시고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영인 진남관이 장군께서 충(忠)을 실천한 곳이라면 이충무공 자당지는 장군께서 효(孝)를 실천한 곳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카락이 있으면 어떠하랴마는 위에 늙은 어머니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계사년(1593년) 6월 12일에 쓴 난중일기입니다. 늙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하실 장군의 효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전쟁 중에도 어머니께 수시로 문안을 드리고, 기운이 쇠약해진 어머니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을 받고서 1597년(선조 30) 2월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뒤 하옥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8일 만인 4월 1일에 풀려나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경상도로 향하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습니다. 그때 여수에 머물고 있던 초계 변씨는 이순신이 파직되자 본가인 아산을 향해 가던 중 4월 11일 배 위에서 탈진하여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신 것입니다. 4월 13일에 부고를 접한 이순신은 16일에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사흘 뒤인 19일 경상도 합천을 향해 백의종군의 길을 떠납니다. 

지금도 자당지 주변에는 유난히 목화꽃이 많습니다. 목화는 ‘어머니의 사랑’을 의미하는 꽃입니다. 초계 변씨는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하옥되었던 이순신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오던 중, 배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고 고통스러워할 아들을 걱정하며 배에 올랐을 어머니의 마음을 목화꽃이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순신의 평생동지를 만날 수 있는 곳, 이순신공원”

   
▲ 여수항일독립운동기념탑. ‘불멸의 비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높이 17m 규모의 기념탑은 승리(Victory)의 영문 ‘V’와 3·1독립만세운동의 ‘만세’, 여수반도 지형의 ‘나비’를 상징하는 세 가지 의미를 담았습니다. ⓒ정명규

이순신공원은 여수시 웅천지구의 택지개발 사업을 하면서 준공된 공원으로 면적이 36만4천379㎡로 장미원, 수생식물원, 미로원, 바닥분수, 기념상징물, 다목적운동장, 어린이 놀이터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그 중심에 여수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있습니다.

2014년 3․1절에 제막식을 가진 이 탑은 높이 17m 규모로 여수반도의 모양인 나비 형상의 탑으로 여수지역 독립유공자 40인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탑에는 다음과 같은 ‘여수항일독립운동기념탑 취지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겨 읽으면, 외국에 나가면 왜 자기 나라를 어머니의 나라, 모국(母國)이라고 부르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물밀듯 쳐들어오던 왜적을 무찌르고, 전라좌수영을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구국의 성지로 우뚝 세우셨습니다.

구한말 조국의 산하를 침탈하는 일제에 맞서 의병이 되신 분, 기미년 3월1일 파고다공원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하고 전단을 나눠주며 만세를 외치던 학생대표도, 광주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왼팔이 잘려나간 여학생도,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한 광주고보 5학년 급장도, 조선일본별국 일본져라 조선지광 조선만세를 돌에 세긴 열네 살 소년도,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사랑의 원자탄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셨습니다. 이분들이 여수사람이라는 데 놀라고 자부심과 긍지를,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2012여수세계박람회를 성공 개최하고, 세계4대 미항 여수로 우뚝 세운 30만 여수시민들이, 선열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여기 터를 잡아 여수지역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세웁니다. - 여수항일독립운동기념탑 취지문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도운 사람들 바위산 전망대에 올라가면 탁 트인 여수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도운 사람들’을 찬찬히 보노라면 장군을 장군 되게 하신 분들에 대한 감사가 크게 느껴집니다. ⓒ정명규

이순신 공원 내부 바위산 전망대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도운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을 도왔던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억기, 원균, 권준, 어영담, 배흥립, 이순신(李純信), 김완, 김인영, 나대용, 정운, 송희립, 정걸, 정씨 사충신, 해상의병등 여러 분이 장군과 생사와 고락을 같이한 평생동지들이었습니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의하면 이순신을 따라 참전하여 죽거나 공을 세운 호남인 144명이, ‘충무이공순신동순참좌제공(忠武李公舜臣同殉參佐諸公)’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전쟁은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순신을 해전사의 영웅으로 칭송한다면, 그를 도와 전쟁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이들도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아 마땅합니다.
‘젊은이순신’이 되고 싶어 함께 순례를 떠난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 이순신로를 순례하면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뭐예요?
임다경(충무고 2학년) : “저는 이순신공원에 있는 ‘이순신 장군을 도운 사람들’이 소개된 곳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이순신 장군이 훌륭한 업적을 세울 수 있었던 건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면서 ‘그들이 왜 목숨을 바쳐 이순신을 도왔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는데, 그들이 이순신의 사람됨에 감동한 것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의 인품을 느낄 수 있는 곳, 오충사”

   
▲ 오충사. 이순신 장군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정철·정춘·정린·정대수의 충심을 기리는 사당입니다. ⓒ정명규

사헌부 현덕승에게 보낸 1593년 7월 16일자 편지에서 이순신 장군은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방벽이니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뜻의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수시 웅천동에 있는 오충사(五忠祠)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창원 정씨 집안의 충신 4인의 신위를 모신 사당입니다. 정철(丁哲, 1554~1595), 정춘(丁春, 1555~1594), 정린(丁麟, 1556~1595), 정대수(丁大水, 1565~1599)의 신위를 모셔 사충사(四忠祠)라고 했으나, 1927년 창원 정씨 후손들과 충무공의 직계 후손들이 합의하여 웅천동 송현마을에 사우(祠宇, 따로 세운 사당집)를 건립하고 이순신을 주향으로 하고 4충신을 배향하면서, 오충사라 하였습니다. 이순신을 중심으로 부복한 4충신의 모습에서 장군의 인품이 얼마나 고매했을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 오충사 비석. 충무공을 주벽으로 모시고 기존의 4충신을 기리기 위한 비석입니다. 4충신의 충렬과 함께 이순신의 고귀한 인품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정명규

오충사 인근에는 자당지가 있습니다. 웅천마을에 정철의 집이 있었으므로 이순신은 어머니 초계 변씨를 이곳으로 모시게 하여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변씨 부인은 이곳에서 5년 가까이 피난살이를 하였는데,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고마움을 표할 정도로 정씨 일가는 장군의 어머니 변씨 부인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주위에는 항상 몸을 바쳐 이순신을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도운 전라 좌수영과 우수영 사람들만 해도, 문헌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람만 540여 명에 이릅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임명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이순신 막하에서 그를 도왔습니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백성이 관리들 밑에 전쟁에 나가는 것을 극히 회피하였는데, 이순신의 수군에는 자발적으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까닭을 우리는 이덕형의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고 난 뒤 이순신의 인품에 감복한 당시 우의정 이덕형은 다음과 같이 이순신을 애도하였습니다.

“이순신이 전사한 부음이 전해지자 호남의 온 지방 사람들은 통곡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늙은 할머니와 아이들까지도 모두 슬퍼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일편단심 충성스러운 마음을 나라를 위해 바쳤고 한 몸을 아낌없이 의리를 위해 바쳤으니 비록 옛날의 훌륭한 장수라 하더라도 그보다 훌륭하지는 못할 것이다.

애석하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 쓰지 못하여 이순신이 자기 재능을 한껏 펴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만약 병신 정유 연간에 이순신을 통제사의 직책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였다면 어찌 한산싸움에서 패배하여 호남과 호서가 적의 소굴이 되었을 리가 있었겠는가. 아, 애석하도다.”

“이순신의 자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 거북선공원”

   
▲ 거북선공원. 거북 모양의 인공호수와 거북선 모형이 있어서일까요? 여수시민의 휴식처 거북선공원입이다. Ⓒ정명규

거북선공원은 여수시 학동에 있는 도심 속 공원입니다. 거북 모양을 한 인공호수와 대규모의 원형 잔디광장, 야외공연장, 산책로 등을 고루 갖추고 있어서, 여수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야외무대가 있어서 각종 행사가 열리는 문화의 공간이기도 하고, 거북 모양의 인공호수를 빙 둘러 낸 산책로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호수를 둘러 수양버들과 후박나무, 가시나무 등을 심어 많은 사람들이 편히 쉬고 있습니다. 또한 거북선공원에는 여수시 적량동과 평여동에서 발굴한 남방식 고인돌들을 옮겨 복원해 놓아서 새로운 볼거리도 있습니다.

호수 가운데 설치된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을 떠올릴 수 있는 조형물입니다. 어머니 변씨 부인은 평소 아들 이순신에게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는 당부를 하셨는데,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서일까요, 이순신은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 오늘 우리가 편안한 삶이 가능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순신은 여수 사람들에게는 ‘가서 쉬기에도 마음 편한 분’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애로움입니다.

“이순신의 지략을 만날 수 있는 곳, 선소”

   
▲ 굴강(掘江).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주력 무기인 군함을 수리하고 군함을 정박시키던 곳입니다. Ⓒ장민서

여수에는 좌수영 본영 선소(중앙동), 방답진 선소(돌산읍), 여수 선소(시전동) 등 세 곳의 선소가 있었습니다. 본영 선소는 현재 이순신광장이 조성된 곳으로 바다가 매립된 위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방답진 선소는 전선을 정박하던 굴강만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습니다.

여수 선소(옛 여천 선소)는 거북선을 수리하거나 대피시키던 ‘굴강’, 칼과 창을 갈고 닦던 ‘세검정’, 수군 지휘소이던 ‘선소창’, 칼과 창을 만들던 ‘대장간’, 무기를 보관하던 ‘군기고’ 등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수 선소에서는 거북선을 건조하지는 않았고, 좌수영 본영 선소(중앙동), 방답진 선소(돌산읍)에서 거북선을 건조하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군사들을 훈련하고 무기를 정비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돌격선인 거북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거북선 건조에 관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 선소에서 거북선을 건조하던 과정과 함께 완성 이후 처음으로 시운전을 하고 포격연습을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거북선이 완성된 것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하루 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 여수 선소를 순례하며 느낀 점이 뭐예요?
김연진(충무고 2학년) : “이제까지 나는 여수 선소가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 여수 선소에서 거북선을 건조한 곳이 아니라 수리하고 보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굴강의 안내 표지판에도 ‘거북선 건조 및 대피한 곳’이라고 적혀 있는데, 좀 더 고증을 거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장군께서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셨는데, 후손들이 이런 일을 소홀히 하면 되겠어요?”

“이순신의 전우들을 만날 수 있는 곳, 흥국사”

   
▲ 흥국사 일주문. 흥국사는 진달래축제로 유명한 여수 영취산 중턱에 자리 잡은 호국불교 사찰입니다. ⓒ정명규

영화 ‘명량’을 보면 이순신이 탄 장군선에서 전투를 벌이는 승군들이 나옵니다. 이들이 바로 의승수군(義僧水軍)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스님들도 전투에 나서라고 독려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한 달 만에 무려 400여 명의 스님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충무공은 수시로 흥국사의 공북루(拱北樓)를 찾아 승군을 훈련시켰습니다.

의승수군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만약 의승수군이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은 전쟁을 백전백승으로 이끌기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일본 선박은 이들 유격대에 의해 번번해 불에 타 부서졌다”는 일본측의 기록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유격대’는 비상사태에 재빨리 출동해 대처할 수 있게 특별한 훈련을 한 기동타격대인데, 바로 의승수군을 의미합니다. 의승수군은 관군의 보충대나 예비대가 아니라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막강 수군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후에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은 흥국사를 불태워 폐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스님들이 전투의 중심에 서게 된 배경에는 이순신 장군과의 깊은 인간적 신뢰가 작용했습니다. 충무공이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옥고를 치르다 방면되어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러 가는 도중인 1597년 5월 정혜사의 덕수스님이 이순신 장군에게 짚신 한 켤레를 바쳤습니다. 그 다음날 승장 수인스님이 밥 지을 스님도 데리고 왔습니다. 장군의 인간됨이 새삼 느껴집니다.

   
▲ 의승수군유물전시관.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승수군 300여 명의 명단이 적힌 상량문과 함께, 당시 승병들이 사용하던 칼, 창, 철퇴 등의 무기와 승복 등 20여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명규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킨 호남의 중심에 흥국사가 있었습니다. 흥국사(興國寺)는 말 그대로, ‘나라가 흥하기를 바라는 사찰’이었습니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이후 300년에 걸쳐 전라좌수영 산하 의승수군(義僧水軍)의 본영이었습니다.

1988년, 흥국사를 새롭게 지으면서 선당과 적묵당, 심검당 등의 전각에서 의승수군과 관련된 상량문이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의승수군 300여 명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동안 구전되어 오던 흥국사의 면모가 드러난 중요한 자료입니다. 전시관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수군들이 사용하던 칼, 창, 철퇴 등의 무기와 승복 등 20여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 내는 간절한 마음이라고 하던데, 스님들의 나라 사랑이 바로 그러하셨습니다. 조선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그토록 멸시받던 스님들이 떨쳐 일어난 모습에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왼쪽은 여수이순신광장 근처에 있는 동상이고 오른쪽은 해군사관학교에 건립된 동상입니다. ‘칼을 쥔 이순신 동상’은 매우 낯익은데 ‘활을 든 이순신 동상’은 왠지 낯섭니다. ⓒ 정명규

이순신-여천로를 순례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순신의 고결한 삶을 현재화시키고자 하는 이순신공원에 장군의 동상이 건립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물론 여수에는 자산공원에도 장군의 동상이 있고 이순신광장에도 동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상은 ‘큰 칼을 쥐고 있는 동상’으로 고증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끊임없이 받아온 모습 그대로입니다.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임원빈 소장(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그런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명량’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탐 대장선 갑판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임원빈 소장님에 의하면, 그것은 명백한 허구라는 것입니다.

“조선 수군은 함포 포격 전술을 쓰는 첨단 수군인 데 반해, 일본 수군은 적의 배에 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재래식 수군이었습니다. 명량해전 때에도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은 함포와 화살로 적을 공격했을 뿐, 접전을 벌이지 않았어요. 조선 수군의 전략은 일본 수군과 백병전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수군이 일본 배의 두 배 크기인 판옥선을 만든 이유도 일본 수군이 기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일본이 칼의 나라였다면, 조선은 활의 나라였거든요. 칼로 싸워서는 우리가 이길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소장님은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2015년 11월 27일 경남 창원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새로 건립된 이순신 동상은 칼을 쥔 모습이 아니라 활을 든 모습입니다. 실전용 조선 환도(環刀)를 차고 조선 수군의 대표적 무기인 활을 들고 있는 장군의 동상이 실제에 가깝지요. 난중일기를 봐도 이순신 장군은 활쏘기가 일상생활이었어요. 스스로 활쏘기 연습에 매진했고, 부하들에게도 칼로 적을 베는 것보다는 활로 사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으니까요.”

조선의 대표병기인 활을 왼손에 들고 등에는 화살통을 메고, 오른손에는 등채를 들어 삼도수군을 지휘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여수이순신공원에서도 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간직한 채, 이순신-여천로의 순례를 마감합니다.

   
▲ 여수충무고등학교 앞에서 젊은기자들 8기 특별취재반 이혜인, 정세운, 정명규 ⓒ강민혁

기사작성 : 젊은기자들 8기 ‘이순신-여천로’ 특별취재반 이혜인, 정세운, 정명규 기자

덧붙이는 말 : 만약 이순신 장군이 의병대장 이인영처럼 부모상을 이유로 전장에서 물러나와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이순신의 ‘이단아적 행동’에 대한 이유를 끝내 찾지는 못했지만, 이순신에게 어머니는 당신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이 땅 모든 백성들의 어머니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하여 봅니다. 나라에 대한 ‘충’은 부모에 대한 ‘효’에서 발원하여 확장된 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한편, 장군의 어머니 초계 변씨의 강단이 아들 이순신으로 하여금 ‘이단아적 행동’을 하게 만들었으리라는 생각도 함께 하였습니다.
난중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갑오년 1월 12일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도록 해라!”하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을 탄식하지 않으셨다.

‘젊은기자들’ 8기 특별취재반 ‘이순신-여천로’ 대표기자 이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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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이웃 ‘한센인’] (2)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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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의회 13일 정례회 개회…39일간 예산안 등 안건 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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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박람회법 개정안 국회 법사위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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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칼텍스 예인선 불법 운영 의혹 사실로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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