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회, 여순사건 ‘추모’ 대신 ‘위령’ 논란
지역교계, 여순사건 관련 행사 참여 불투명

▲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우리나라에서 LIFE의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칼 마이던스(Carl Mydans)가 찍은 사진.

지난해 여수·순천 10·19사건(이하 여순사건) 70주기와 올해 특별법 제정 기대가 높은 상황에서 최근 여순사건 조례를 일부 개정한 여수시의회가 명칭 변경 과정에서 사실상 실익이 없는 용어 논쟁을 벌여 모처럼 조성된 화합과 상생 분위기를 저해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유가족은 물론 지역사회의 숙원인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위해 지역적 한계를 넘어 범국민적으로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에 시의회가 되레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수시의회는 지난 27일 제191회 임시회 제3차 본회의에서 기획행정위원회가 심사·수정한 ‘여수시 여수·순천 10·19사건(이하 여순사건) 지역민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 일부 개정 조례안’에 대한 수정안을 표결 끝에 통과시켰다.

이번 개정안은 여순사건 위령사업 지원의 원활한 추진과 시책에 대한 자문 기구 구성을 위한 ‘여순사건 추모사업 시민추진위원회’ 설치 조항 신설이 핵심이다.

조례에는 시장은 ▲평화공원 조성사업 ▲여순사건 지역민 희생자 관련 자료의 발굴 및 수집, 간행물 발간 ▲평화인권을 위한 교육사업 ▲희생자 추모와 관련된 각종사업 등 지원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여수시 여수·순천 10·19사건 지역민 희생자 추모사업 시민추진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이날 의원들은 시민추진위원회’ 명칭을 ‘추모’로 할 것이냐, ‘위령’으로 할 것이냐 ‘용어’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기획행정위원회가 ‘추모’로 결정해 본회의에 상정한 안에 대해 주종섭 의원이 ‘위령’으로 수정을 요구한 것이다.

▲ 지난 8월 17일 여수시청에서 열린 ‘여순사건 70주년 기념 추모사업 시민추진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여순사건경찰유족회장과 여순사건유족회장(오른쪽)이 포옹하고 있다. (사진=여수시 제공)

“조례 명칭 등에 맞게 위령으로 통일해야”
“유족도 ‘추모’ 동의, 수정안 실익이 없다”

주종섭 의원은 수정안 제안 설명에서 “조례 명칭이 ‘위령사업’으로 돼 있고 기획행정위 수정안 제7조 위원회 기능, 제8조 위원회 구성, 제16조 포상 규정 등에 위령사업이라고 규정돼 있는데 유독 제6조 추모사업 시민추진위회만 ‘위령사업’으로 수정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주 의원은 이어 “추모사업 시민추진위원회 설치 규정을 조례의 명칭과 정의 등 제반 규정에 명시된 위령사업에 부합하도록 ‘위령사업 시민추진위원회 설치’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제주4·3특별법에도 위령으로 돼 있으며 위령은 큰 의미이고 추모는 축소한 것”이라며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가속화하기 위해서도 위령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령’ 용어 사용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박성미 기획행정위원장은 “‘추모’ 대신 ‘위령’으로 할 경우 여순사건 관련 행사에 기독교계에서 참여하지 않겠다는 방침인데다 유족회가 ‘추모’에 동의했고 상임위도 격론 끝에 ‘추모’로 결정했는데 왜 굳이 ‘위령’으로 수정안을 내느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박 위원장은 “향후 특별법이 제정되면 거기에 맞게 개정해도 되는 것이고, 화합과 상생을 위해 지난해 교계가 처음으로 추념식에 참석하는 등 분위기가 좋은데 굳이 지금 개정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 여수시의회 의원들이 지난해 이순신광장에서 열린 ‘여순사건 70주기 희생자 합동 추념식’에서 헌화 분향하고 있다. (사진=여수시의회 제공)

여순사건 특위 위원장인 전창곤 의원도 “‘위령’으로 수정안을 내서 얻게 되는 실익이 무엇이냐”며 “‘추모’로 한다고 해서 중대한 법적 흠결이 있는 것도 아니고 통일성이 없는 것이 하자도 아니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상임위에서도 ‘위령’으로 통일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유족들도 ‘추모’에 동의하고 4대 종단이 참여해 화합·상생하자는 의미에서 ‘추모’가 좋겠다는 여수시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고 했다. 이어 “‘위령’은 제사를 연상시켜 교계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는 만큼 이를 십분 감안한 것이며, 명칭 가지고 의회에서 난상토론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시민들에게 분열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겠다 싶어 고민 끝에 상임위에서 ‘추모’로 결정한 것이다”고 강조했다.

전 의원은 특히 “시기가 중요하다. 작년에 여순사건 70주기를 맞았고 문재인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전향적이다. 특히 특별법 제정을 앞두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살얼음판이다. 이런 시기에 한마음 한뜻을 보여줘야 하는데 ‘위령’으로 한다고 해서 실질적인 이득이 없다. 중대한 흠결이 아니라면 화합 차원에서 원안대로 통과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주 의원은 “오늘도 기독교 단체에서 전화를 받았고 목사님들에게 물어봤는데 ‘위령’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일부 종교 단체에서 반대 의견을 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은 맞지 않다”고 위령을 고수했다. 주 의원은 이어 “(용어의)개념에 대한 거부 정서가 있다고 해서 용어를 통일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결국 표결에 부쳐 재석 의원 25명 가운데 찬성 13명, 반대 10명, 기권 2명이 나와 결국 ‘위령’으로 결정됐다. ‘위령’에 서완석·정경철·고용진·주재현·고희권·김승호·나현수·주종섭·문갑태·강현태·김영규·김행기·백인숙 의원은 찬성, 송재향·박성미·정현주·정광지·강재헌·이선효·전창곤·김종길·이찬기·송하진 의원은 반대했다. 민덕희·이미경 의원은 기권했다.

   
▲ 2017년 10월 19일 여수시 여서동 미관광장에서 열린 여순사건 제69주기 희생자 위령제. (사진=독자 제공)
   
▲ 2018년 10월 19일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광장에서 열린 여순사건 70주기 희생자 합동 추념식. (사진=여수시 제공)

이와 관련 지역 교계가 조만간 공식 입장을 밝힐 예정인 가운데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앞둔 중차대한 시기에 지역 여론을 응집하는데 앞장서야 할 시의회가 되레 이를 저해한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여수기독교단체총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위령’으로 하면 교계는 앞으로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며 “다음 주 정도에 공식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종교별 특수성을 고려한 지혜로운 대처가 아쉽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가운데 모처럼 화합의 장이 형성되면서 지역 교계가 작년에 처음으로 여순사건 추념식에 참석하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해왔는데, 때 아닌 ‘용어’ 논쟁이 벌어지면서 교계의 참여가 불투명해지는 등 ‘대화합’이 분열로 뒤엉키는 형국이 우려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와 함께 지난해 여순사건 70주기를 맞아 지역 교계는 물론 보수·진보로 맞서 분열된 시민정서를 해소하는데 노력해온 여수시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시는 그동안 여순사건 관련 행사나 조례 제정 등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 여수지역의 한 교회에서 성도가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대국민 서명지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독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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