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석 (UNIST 입학사정관, 전 여천고 교장)


교사 시절 내내 4월은 고행의 달이었다. 농어촌지역 담임의 역할 중 가장 힘든 것이 가정방문이었다. 도시에서야 담임이 아니라도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들이 자녀들을 알아서 챙길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의 낮은 학력수준과 경제적인 사정으로 방치되기 쉬운 시골학교일수록 교사의 가정방문은 꼭 필요하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읍 단위 고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고 맨 먼저 학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것이 가정방문이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고등학교가 많지 않아 인근에 있는 서너 개의 군에서 모여든 학생들이 많았다. 매년 3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가정방문이 시작된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할 일을 모두 팽개쳐두고 신들린 사람처럼 학생들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해야 4월이 끝날 무렵쯤이면 내가 맡은 60여 명의 우리 반 학생들의 가정방문을 겨우 마치게 된다.

특히 농촌의 4월은 농번기나 다름없다. 가정방문 중 부모가 계시지 않는 집이 태반이었다. 교육환경은 물론 학교생활에서 발견하기 힘든 것들을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일요일 시골길에서는 식당은커녕 구멍가게도 찾기 힘들 때가 많았다. 그럴 때는 점심도 거르기 일쑤였다.

자동차도 흔치 않던 시절 일요일 종일 길거리 먼지를 뒤집어쓰며 연례행사처럼 고난의 4월을 보내야 했다. 발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힘든 가정방문이었다.

가정방문을 모두 마치고 나면 학생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게 된다. 학생들과의 소통이 원활해지고 학급운영이나 생활지도가 한결 부드러워짐은 물론이다.

“지난 태풍 때 삐걱거리던 그 대문 넘어지지 않았느냐?”
“강아지 새끼 몇 마리나 태어났니?”
“군대 간 둘째 형은 언제 제대하니?”

이런 식으로 내가 맡은 학생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깊은 대화를 누눌 수 있어 좋았다. 가정방문 길에 학생과 둘이서 들길과 논두렁을 걸으며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게 된다.

학생의 성장과정은 물론 학교생활에서 불편한 점이나 고민을 비롯한 속내까지도 파악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상담과 교육의 장이 되곤 하였다. 이렇게 맺어진 사제 간의 정이 30여 년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음은 물론이다.

아버지는 이웃마을로 머슴살이 가고, 어머니는 서울에서 가정부 일을 하느라 집을 비워 가장 역할을 하는 학생을 발견하고 울어버린 적이 있다.

집에는 팔순이 넘은 반신불수의 눈먼 할머니와 어린 동생 4명을 보살피고 있었다. 이런 학생에게 지각했다고 꾸중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독거려주어야 한다. 물론 밤늦도록 텔레비전을 보거나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걸핏하면 지각하는 학생은 특별한 지도가 필요할 것이다.

신출내기 교사시절 군청소재지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토요일 오후 학생과 함께 빵으로 점심을 때우고 가정방문 길에 나서게 되었다.
길을 가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 다음 월요일 오후에 다시 그 학생의 집을 찾아 나섰다.

학생과 함께 버스에서 내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시간 남짓 산길을 오르다 보니 듬성듬성 10여 호의 작은 산골마을이 나타났다.
위에 양철 갓을 씌운 싸릿대로 만든 사립문이 비스듬히 넘어져 가고 있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자 구멍이 숭숭 뚫린 초가집 마루에 늦은 오후 햇살이 가득하였다.

나이 지긋한 어머니는 밭일을 하다말고 막내아들의 담임을 보자 잔뜩 당황한 표정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머니의 속사정을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에 담임이 온다는 말은 들었으나 믿지 않았다고 한다. 교통이 불편하여 그동안 중학교나 고등학교 선생님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설마하면서도 ‘우리 선생님은 남다르다’는 아들의 성화에 속는 셈치고 집에서 키우던 닭을 한 마리 잡아 삶아두고 기다렸다고 한다.

기다리던 토요일에 담임교사가 오지 않자 삶은 닭을 우물 속 깊숙이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냉장고는 말할 것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틀이 지난 월요일에 닭이 상할까 걱정이 되어 먹어버리고 난 뒤에 담임이 온 것이다. 준비한 닭을 먹었다는 자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어머니의 순박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방금 낳아 온기가 남아 있는 날계란을 권하는 어머니의 겸연스러워 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마을에서 20여 리 떨어진 면소재지에 나가야 가게가 있던 시절, 닭을 잡았다는 것은 가장 융숭한 손님맞이였다.
자식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학생 어머니를 보면서 문득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떠올라 한동안 말문을 잃고 학생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자신은 굶어도 자식을 위해 등이 굽도록 헌신하다 일생을 마치시는 우리의 부모님들이 아니던가. 지금과 같이 세계 10위권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도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자식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였기 때문이리라.

해방과 6․25의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자식 교육열만큼은 세계 1위를 차지하는 희생적인 우리 부모들이었다. 누구나 궁핍의 기억은 비슷한 시절을 살아왔던 이들에겐 모자이크처럼 얼룩진 공유의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부모님은 7남 1녀의 8남매를 두셨다.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었다. 시골에 살면서도 논밭 한 마지기 없이 품을 팔거나 어머니의 행상으로 하루하루 겨우 연명해 나는 형편이었다. 어머니의 일생은 눈물을 삼키며 견뎌낸 고난과 상처의 역사였다. 허기진 몸을 곧추세우고 자녀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주신 어머니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선다.

우리 어머니의 가장 큰 아름다움과 덕은 인내심이었다. 어머니의 생애는 오로지 온갖 일을 참으며 기다림으로써 삶을 차분히 끌어온 분이셨다. 가난도 참고, 마음과 몸의 고통도 참아가며 말없이 자기 본분만을 지켜왔다. 노인복지회관 초청으로 노인대학 연단에 설 때면, 부모님을 마주한 것만 같아 목이 메어 말문을 열지 못한 적이 있다.

뉘엿뉘엿 해 질 녘이 되어, 산등성을 몇 구비 넘어 면소재지에 나오자 읍내로 나가는 마지막 버스가 이미 떠난 뒤였다.
하는 수없이 택시를 타고 광주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밤 10시가 넘었다. 생각보다 택시비는 큰 액수였지만 담임으로서 내 할 일을 다 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한 하루였다.

가정방문을 통하여 통닭 열 마리를 대접받은 것보다 더 고운 마음씨를 가진 학부형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 당신 한 몸 돌보지 않고 불평 한마디 늘어놓지 않으시던 그 깊은 속뜻을 지닌 이 땅의 어머니를 만난 듯했다.

알량한 봉투를 억지로 넣어주고 교사의 동정이나 살피는 도회지의 얄팍한 학부모들에 비해서 얼마나 순수하고 소박한가.

날이 갈수록 순박함과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태에 그날의 가정방문은 지금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간직하고 싶다.  

저작권자 © 뉴스탑전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