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석 (울산과학기술대학교 입학사정관, 전 여천고 교장)







여행하면 기차여행이 먼저 떠오른다. 기차의 규칙적인 덜컹거림이 심장의 고동처럼 들렸던 초등학교 시절, 밤잠을 설치며 기차를 타고 떠났던 수학여행은 얼마나 설렜던가.



전라선 열차를 타고 가노라면 기적소리에 놀란 꽃잎이 차창 밖에서 눈송이처럼 날리고, 섬진강변을 지날 때면 코스모스의 깔깔대며 웃는 모습이 우리를 들뜨게 해 주었다.



도회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친구와 자취를 하면서 먹을거리가 동나면 교대로 시골집에 다녀왔었다.

매월 두 차례씩 토요일 오후 4시간 남짓 걸리는 열차를 타고 집에 내려갔다가 일요일에 올라오곤 하였다.



꿈 많던 시절 양손에 쌀자루와 김치 보따리를 들고 플랫폼에 나가 기차를 기다렸다. 연착이 잦던 시절, 저 멀리서 시커먼 기차가 지축을 울리며 기적소리와 함께 내 가슴 속으로 들어서는 것만 같아 설레던 기억이 새롭다. 성인이 된 지금도 열차를 타게 되면 가벼운 흥분이 앞서는 것은 여전하다.



당시에는 도로가 형편없었고, 고속버스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완행열차는 늘 만원이었다. 특히 야간열차는 열차와 열차 사이를 잇는 공간과 출입문까지도 가득 차서 신문지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짐을 베개 삼아 밤기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기대어 가기 일쑤였다. 석탄을 연료로 쓰던 그 시절에는 터널을 지나고 나면 콧구멍이 시커멓게 되기도 하였다.



생각해보면 느리고 덜컹거리던 완행열차였으나 당시로서는 얼마나 엄청난 문명의 이기였던가. 1960년대 중반 대학입시를 위해 서울행 야간열차를 탔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난생처음으로 나선 서울 길이었다.



밤새껏 보던 책을 덮고 잠이 들려는 순간, 열차 안에서 들려오는 ‘영등포의 밤’이란 구성진 노랫소리에 눈을 떠보니 새벽녘 영등포역에 닿고 있었다. 내가 본 서울의 첫 모습이었다. 그날이 어제인 듯 기억에 새롭다.



 



수많은 애환 속에 삶은 계란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완행열차, 찢어지도록 지겨운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 난간도 두려워하지 않고 매달려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열차 안은 언제나 한겨울 추위를 녹일 만큼 여행자들의 체온으로 따뜻하기만 했었다. 생면부지의 갖가지 사연을 지닌 사람들과 부대끼며 가는 상경 길이었지만, 함께 간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기차여행은 불편하긴 했어도 힘든 줄 몰랐다.



운 좋게 좌석이라도 잡게 되면 누구는 주섬주섬 짐 속에서 삶은 밤이나 고구마를 꺼내 옆 사람에게 나눠주고, 누구는 꽁꽁 싸매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어서 객석의 무료함을 달래주기도 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정년퇴임을 하고나서 지난해 나는 매주 수요일이면 기차여행을 하였다. 3월부터 새마을호를 타고 2시간 남짓 걸리는 여수-전주 간을 오고 갔다.

처음에는 자동차를 타고 다녔으나 열차를 이용하면 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기치 않는 도로 사정이나 날씨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정확하게 시간을 지킬 수 있었다.



열차카페에 앉아 커피 향과 함께 아름다운 섬진강의 물길을 따라 사색에 잠기는 행복도 만끽할 수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책을 읽으며 가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 것이 아니었다.



여름 한 철이면 전라선에는 바캉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임시열차가 운행된다. 이 때면 피서객들이 반바지 차림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열차 칸을 가득 메운다.

피서지에서 돌아올 때는 열차에 오르자마자 의자를 잔뜩 뒤로 제치고 곤한 잠에 빠진다. 그리고 더러는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온갖 수다와 소란으로 귓전이 따가울 때도 있다.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유독 우리들의 목소리가 크다는 것을 실감했던 일들이 새삼 떠오른다. 또한,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오랫동안 휴대전화를 주고받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도 보게 된다.



어느 동네 미장원 값이 싼지, 어느 집 식구는 건강식으로 무엇을 먹는지 따위의 시시콜콜한 남의 개인사를 듣고 있어야 한다.

‘간접통화’의 고통은 ‘간접흡연’의 고통만큼이나 견디기 힘들다. 거의 전 국민이 휴대전화를 쓰는 나라에서 모바일 에티켓이 무시되는 게 안타깝다.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다는 우리나라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 않는 사회, 상대를 배려하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가 아닐까.

우리는 보릿고개를 넘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동안의 철도발달 과정만큼이나 우리의 국력이 변모한 것이다.



열차가 달리다가 중간 역에서 석탄과 물을 공급받아야만 가곤 했던 증기기관차에서부터 디젤기관차, 전기기관차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오늘날은 숨 한번 쉴 때 300m씩 내닫는 엄청난 속도의 한국형 고속열차(KTX)가 달린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 수준은 아직도 전근대에 머물고 있음을 본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의식은 버려야하지 않을까.



그런 의식이 깊숙이 스며든 데는, 속도의 문화도 한몫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시간에 쫓겨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자꾸 잃어가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고속열차의 등장으로 창문을 열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차창 밖의 경치를 즐길 수 있는 ‘느림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길 위의 경험도, 차창 밖의 풍경도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는가.



문득 속도에 밀려 사라져 가는 간이역 풍경이 그립다. 간이역이 그리운 것은 우리의 마음 둘 곳이 하나둘 사라져 감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이라도 훌훌 털고 전국의 구석구석을 연결해주는 ‘테마 기차여행’을 떠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수많은 사람이 머물다 간 삶의 흔적을 찾아 한 번쯤 간이역에 내려 보고 싶다. 기차여행을 떠난다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는 초겨울이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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