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수는 거북선의 고향이다 -



여수시축제위원회 부위원장 심 재 수







우리고장 여수는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함께 국난을 극복한 의로운 선조들의 호국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충절의 고장이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거북선 그리고 우리고장 좌수영 선조님 들이다.



그동안 이충무공에 대한 업적과 정신은 많은 학자들과 단체에 의해 선양되고 있지만 이충무공함대의 주역인 좌수영 수군과 흥국사 의승수군의 역할과 업적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으며 전라좌수영이 임란초기 통제영으로 승격되었으나 중앙정부의 지원을 일체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모두가 한마음 되어 많은 인력과 물자를 조달하여 자력으로 통제영을 운영한 우리고장 선조들의 업적은 주목받지 못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거북선 또한 임진왜란당시 활약한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연구되지 않고 임란 후 건조된 거북선만 복원된 실정이다.

현재 복원 전시된 거북선은 그 구조와 화력의 배치 공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이충무공의 장계나 충무공전서에 나타난 거북선의 기능을 충족할 수 없는 모양으로 복원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바다에 띠울 수 있게 복원된 거북선은 지난번 한강에서 경남 통영으로 옮긴 통영거북선과 해군사관학교 거북선. 그리고 여수 돌산에 있는 여수거북선 해서 모두 3척인데 모두가 최초 이충무공께서 건조하신 좌수영 거북선에서 시대에 따라 변형된 거북선이지 임란당시 맹위를 떨쳤던 거북선은 아니다.

이러한 근거는 이순신장군께서 직접 쓰신 장계와 1795년 정조9년에 발간한 충무공 전서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장군께서는 당포파왜병장(당포에서 왜병을 쳐부순 장계)에서 거북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사온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고,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되는데, 이번 길에는 돌격장이 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먼저 거북선에 명령하여 적함대속으로 돌진해 들어가 천, 지, 현, 황 등 각종의 대포를 쏘게 했습니다.”



용머리에서 대포를 쏘았고 적진에 돌격해 들어가 각종 대포를 쏘게 했다는 것은 거북선이 막강한 화력을 위주로 하는 전함이었으며 지금의 2층 구조로는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충무공전서에는 거북선을 당시 통제영(경남통영)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으로 분명하게 구분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라좌수영 거북선 즉 여수제 거북선은 규모에서 길이와 넓이 등은 통제영 구선과 대략 같으나 거북머리 아래에 총포구멍이 2개 거북등 좌우에도 총포구멍이 각각 6개씩 있다고 하여 기록당시 통영에서 건조하여 운영하던 통제영 구선과 그 특징을 구분지어 기록하고 있다.



또한 거북선의 설명문 뿐 아니라 그림도 통제영 구선과 전라좌수영 구선은 확연히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그림만 살펴보더라도 현재 복원된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가까울 뿐 좌수영거북선은 아니다.



임란당시 거북선 즉 좌수영거북선은 이순신장군께서 직접 쓰신 장계의 내용이나 충무공전서의 내용 그리고 각종 총포의 배치와 전선으로서의 기능을 살펴볼 때 2층 구조가 아닌 3층 구조 이어야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남천우 교수와 거북선 연구가 정광수씨가 오래전부터 주장하여 왔으며 지금은 장학근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교수, 최두환 해군교육사령부 충무공수련원교수 등 국내 대부분의 거북선 연구가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거북선하면 떠오르는 최초의 거북선. 여수제 거북선은 한 번도 복원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우리 여수에서 우리의 노력으로 이충무공의 거북선을 복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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