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으로 고운 목소리를 타고 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한 가지 복을 더 지녔다고 하겠다.

교묘한 화장술로 알록달록 꾸며 놓은 미인을 보았을 때보다는 티 없이 맑게 흘러나오는, 고운 목소리를 들었을 때의 내 마음은 한결 즐겁다.

버스 속에서나 혹은 포도(鋪道)에서 단 몇 분이나마 잠시 동안의 우연한 동반자가 되어서 천진난만할 정도로 즐겁게 종알대는 젊은 아가씨들의 얘기(내용에는 관계없이)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나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친화감을 갖게 된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텔레비전이 아니라 귀로 듣는 라디오 드라마라고 할까. 거기에다 얼굴까지 예쁘게 생겼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세상 일이 어찌 그렇게 고루 갖추어질 수 있겠는가.

서울의 이웃이란 담과 벽으로 단절된 채 바로 대문 앞길에서 아침 일찍 잠옷 바람으로 서로 만나도 어느 집 무뢰한인 줄도 모르고 언짢은 표정으로 서로 헤어지고 만다. 호수만 다른, 같은 번지 안에서 살면서 이토록 삭막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도시인의 생리요, 자존심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왔을 때만 해도 집이 드문드문하고 주위가 조용해서 마치 시골 같은 한적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번잡한 서울 도심의 소음을 피해서 일부러 찾아 들어온 곳이다. 그렇던 것이 지금은 전연 사정이 달라졌다.

전후좌우로 가게와 복덕방이 들어차서 밤낮으로 밀어닥치는 소음에는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다. 서로 사이에 왕래는 없다 하더라도 역시 이웃을 잘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바로 앞집은 등을 대고 돌아앉아 있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조용하긴 하나 가끔 부엌 쪽 창문을 통해서 이제 갓 시집 온 듯한 며느리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는 정도이고 별다른 이상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복덕방과 가겟집 아주머니들이다. 아침에는 웃고 만났다가도 저녁때면 으레 정해진 성토대회가 벌어진다.

무슨 이유로 고함을 지르고 싸우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도 요즘에 흔한 습관성인지. 매일같이 그러다보니 동네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 가겟집 사람은 다른 데로 이사를 가게 된다.

이제 살았구나 하여 희망을 품고 며칠 있다 보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 가겟집 주인은 수시로 바뀌게 되지만 결국은 그대로다. 그러니 이제는 집터 탓으로만 돌리고 체념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아침에 일찍 집을 나오면, 직장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가는 나는 이웃 사람들의 얼굴을 잘 모른다.
그러나 담을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를 통해 저건 옆집 싸움쟁이 목소리이고, 저건 또 뒷집 아주머니 개 잡는 목소리이고 등등 이젠 한마디만 들어도 척척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런데 하룻밤에는 무언가 식별할 수 없는, 울음 섞인 여인의 고운 목소리가 비몽사몽간에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잠자리에 든 것이 밤 열한 시가 넘어서였으니까 아마 한 시나 두 시쯤이 아니었던가 싶다. 세상이 모두 잠든, 고요한 이 밤에 난데없이 들려오는 한 소절의 애수의 소야곡, 눈물 섞인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지금까지 들어온 이웃집 아주머니들의 앙칼진 목소리와는 전연 닮은 데가 없었다.

“뭐에요. 나를 감쪽같이 속이고 도대체 어떤 여자에요. 나는 당신이 정말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여보, 나를 어쩔 작정이에요. 나를 우리 집으로 돌려보내 줘요. 정말 원통해요.”

가끔 저속한 내용의 욕설이 섞여 나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젊은 부부의 사랑싸움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대꾸는 한마디도 없는, 여주인공의 일방적인 독백으로 계속되는 대사였다. 그 여인은 한참 흐느끼다가 다시 계속해서 그 고운 목소리로 비련의 대사를 외우곤 했다.

나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 나는 쪽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너무나도 고운 그 여인의 목소리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이건 분명히 연속방송극의 한 자면을 연출한 성우의 애잔한 목소리이지 결코 현실은 아니지 싶었다. 나는 그 뒷날 그 시간쯤 일부러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에도 그들 부부는 그런 싸움 이후 다른 데로 이사를 했는지, 아니면 화해가 되어서 사이좋게 살고 있는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그 고운 목소리로 한 번만 더 싸워 줬으면...’
나의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말 것인지 안타깝기만 했다.



정호경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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