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호경 수필가
자고 일어나 잠이 덜 깨서 눈앞이 뿌옇나 했더니 유리창 밖으로 안개가 자욱해 있었습니다. 앞이 잘 안 보이는데도 시장에 방앗잎 사러 가야 한다면서 집사람이 운전 좀 해 달라고 하기에 갔다가 방금 집에 돌아왔습니다.

장을 본 여러 개의 까만 비닐봉지 중 조그만 봉지에서 쑥떡이 나오기에 하나 집어먹었더니 고소하고 맛이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먹은, 콩고물 묻힌 쑥떡에서 고향 냄새가 나고, 무명적삼에 땀이 밴 어머니 냄새가 났습니다.

작년 추석날 고향 산소에 성묘 갔더니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이 헛기침만 하시고, 어머니는 입술을 쫑긋 세워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밥 묵었냐?”

여수 시내에서 승용차로 30분이면 닿는 화정면 백야도 선착장에서 조그만 여객선을 타고 잠깐을 가니 목적지인 ‘제도’에 닿았습니다.

유부초밥처럼 다소곳이 엎드린 이 섬은 생각보다 깨끗했습니다. 갯마을 골목으로 들어서자 허리가 굵은 황갈색 고양이가 우리 앞을 겁도 없이 천천히 가로질러 가고 있었습니다.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늙어 힘이 빠져 그렇다는 사실을 나중에 마을 노인들에게서 들어 알았습니다. 이 섬에서는 사람이나 고양이나 모두 별 탈 없이 평화롭게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봉사대원 일행이 찾아간 집은 부모가 다 지체부자유자이고, 아랫방에 살고 있는 노총각 아들은 정신박약자라고 하는데, 마침 바닷가에서 낚시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낚싯대를 메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그는 우리를 보더니 괜히 싱글벙글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젊은이들은 모두 대처로 돈 벌러 나가고, 허리 굽은 노인들과 원시의 바다와 하얀 고독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매일 해가 뜨면 매일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먹습니다. 그런 다음 나는 마루에 앉아 돋보기를 끼고 조간신문을 보고, 집사람은 따로 돌아앉아 신문지 속에 끼어들어온 슈퍼마켓 세일상품 광고지를 보면서 놉니다.

개를 키우면 그 녀석 밥 주는 일이라도 있으니 덜 심심하겠지만, 개는 바로 위층에서 키워 도둑이 안 와도 종일 짖어대고 있으니 나는 위층 개 덕택으로 도둑 걱정은 안 하고 삽니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닙니까. 재미없는 세상도 재미있게 살다보면 인생이 즐겁고, 약소하나마 일루의 희망도 보일 것입니다.


춘하추동의 4계절 변화는 해마다 새롭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자연 속에서 삶의 낭만도 모르고 이런저런, 사소한 집안일에 얽매여 친구들과의 약속도 망설이고 머뭇거리다가 결국에는 누룽지가 되어 이 세상을 허망하게 뜨고 맙니다.

스스로를 마음껏 불태우다 가는 단풍잎은 물색이 곱고 아름답지만, 가마솥에 갇혀 열을 받아 끙끙 앓기만 하던 누룽지는 그 우중충한 색깔이 보기에 안타깝고 몹시 슬퍼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제의 열기 때문인지 오늘 아침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그야말로 오리무중입니다. 한 치 앞을 짐작할 수 없는 요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교회에도 가고 절에도 가고 혹은 골방에 쪼그리고 앉아 마음을 갈고 닦지만,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도 어디선가 예쁜 산새소리가 아닌,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리니 밥을 먹다가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아침부터 밤까지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허약한 우리 민초에게 효험 좋은 청심환 한 알만 내려주옵소서.

매일 밤 자기 전 엎드려 기도를 하지만, 석 달 열흘이 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인내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4월 초파일에 멸치젓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젓갈을 안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왜 하필이면 그날이냐고 물었더니, 그날은 마을 아낙네들이 모조리 절에 가고 없으니까 멸치 사는 사람이 없어서 값이 가장 싼 날이라고 답했습니다. 사월 초파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면서 또한 멸치젓 담그는 날입니다.

어시장에 가서 내 수필카페에 올리려고 재미로 이런저런 생선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으니까 손님이 없어서 따분하게 앉아 있던 생선장수 할머니가 “여기 내 도다리도 한 장 박아 주시오. 하도 안 팔린께 불쌍해서 그라요.”

나는 그 할머니의 순박하면서도 고단수의 유머에 감복하여 호주머니를 털어 도다리 2만 원어치를 사 주었습니다.

봄이 오고 가을이 오고, 인생은 그날의 날씨와 기분에 따라 사는 맛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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