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길 28

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딱 1년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 올라가서 거기 있는 소년의 손목을 잡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며, 그 길을 따라 다시 내려올 수 있을까. 사람을 살리는 건 빵이 아니라 빵에 담긴 사랑이라는 마더 테레사의 말을, 그 말의 의미를 조곤조곤 들려줄 수 있을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윽박지르는 세상에 살다 보니,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도 어느새 변했다. 여학교 풍경. 방학이 지나면 교실에 낯선 아이가 앉아 있다. “너, 누구?”하고 물으면 “아이, 샘.”하고 얼굴을 붉히는 아이가 몇 된다. 쌍꺼풀 수술을 하고 붓기가 빠지지 않은 채 나타난 것이다.

그래도 그건 형편이 좀 나은 아이가 선택하는 길. 얼굴을 손대고 싶어도 여의치 않은 아이들은, 3학년이 되면 포토샵의 도움을 받는다. 컴퓨터용 사진 편집 프로그램인데, 이게 환상적이다. 졸업 앨범에 담을 사진을 학교에서 찍어 줘도 막무가내 자기가 찍어 오겠다고 우기는 건 다 까닭이 있다.

서구에서 300년에 걸쳐 이룬 산업화를 30년 만에 뚝딱 해치운 게 우리 아닌가. 그래서일까. 우리는 ‘사람’을 두고도 깊이 살피려 들지 않는다. 새로 만난 사람도 3분 안에 뚝딱 파악하려 든다. 그때 외모만큼 손쉬운 잣대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미용실에 가서 파마를 하듯 성형을 한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를 보고 잔인하다고? 아니다. ‘비포 앤드 애프터’ 사진으로 도배된 성형외과의 선정적 광고를 보라. 훨씬 잔인하다. 어찌 ‘하루 만에 신데렐라’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된단다. 그러니 아이들이 빠져들 수밖에. 처음에는 여학생들이 먹잇감이더니 요즘은 남학생도 대상이다.

이쯤하면 학급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묻고 싶을 게다. 있다. ‘성형’과 사촌인 ‘살빼기’. 멀쩡한 아이가 다이어트를 하다 영양 실조에 걸리고, 그러면서 망가져 가는 것을 아프게 보고 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한때는 밥 먹기도 힘들어하고 공부하기도 힘들어하고 학교 다니기마저 힘들어했다.

의사도 만나고, 여기저기 상담도 받아 보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나도 곁들여 다그치고 어르고 감싸고, 그렇게 씨름했다. 길은 보일 듯하다 다시 사라지길 여러 차례, 기다림도 때로는 노여움이 된다. 하지만 달님은 윙크 한 번 하는 데도 한 달이 걸린다는 말에서 다시 힘을 얻곤 하였다.

아이를 지켜보며 든 생각이다. 성형이든 살빼기든 그 모두가 정서적 허기에서 비롯된다는 것. 그런데 그악스러운 그 올무에서 벗어나려면, ‘사람’이란 살덩어리로만 빚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먼저 보이지는 않지만 나를 가득 채우는 그 무엇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게 있느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을 떠올리면
어쩌면 목숨하고 바꿀 수 있을 것도 같다.
말로 할 수 없는 슬픔에 젖어 있는
아이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런 슬픔을 느꼈다.
- ‘깊은 슬픔에는 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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