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무딘 입맛을 돋우려고 방금 어시장에 가서 정어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냄비 속의 고춧가루 양념이 잘 배어든 정어리 한 마리를 통째로 집어 상추에 싸서 무지막지한 폼으로 입안에 몰아넣어 버걱버걱 씹다가 문득 텔레비전의 ‘동물의 세계’ 한 장면이 떠올라 나는 얼른 숟가락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천지신명이시여, 저를 사람이 가야 할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집 아래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하루 두 차례씩이나 그 많은 친구들과 함께 떼를 지어 몰려왔다 나갔다 하니 심심찮을 것 같은데, 뒷산은 앉은자리에서 몇 세월을 묵묵히 바다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심심하면 나하고 장기나 한 판 하자고 했더니 내 걱정은 말고, 할일이 없으면 집에 가서 <장끼전>이나 읽다가 재미없으면 낮잠이나 자라고 했습니다. 산은 부처가 되어 묵묵한데, 나는 세상 물정도 모르면서 잘난 척 떠벌리며 시끄럽습니다. 오늘은 하늘이 활짝 개어 바다도 산도 맑고 푸릅니다. 밥을 먹으면 힘이 난다는데, 나는 나이만 먹으니 갈수록 힘이 빠집니다.

가다가는 불끈 찡그린 얼굴로 집안에 들어박혀 있는 친구를 봅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세상이 귀찮아서 요즘 철학공부 좀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철학을 하려면 세상에 나와서 사기도 쳐보고 이런저런 인생을 겪어야지 집안에서 라면만 끓여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요. 모두들 얼굴을 활짝 펴고 밖으로 나오세요. 똥파리는 하루를 살다 가도 주방 옆 다용도실을 날 때는 미국 가는 비행기 소리를 냅니다.

나는 꽃들과 해마다 만나는데, 그들은 해마다 곱고 예쁩니다. 그래서 무슨 화장품을 쓰느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그저 봄 따라 왔을 뿐이에요.” 하며 웃기만 하고 대답을 안 합니다. 오월이 되니 신록의 잔물결이 내 서실 유리창 너머로 고향의 시냇물 소리를 내며 흐릅니다. 산과 들이 싱그러워 눈이 간지러운 오월, 사람들은 오늘도 예뻐지는 화장품을 찾아 백화점으로 줄을 지어 갑니다. 나도 따라갈까요.

‘여수엑스포’ 마당에만 사람이 바글바글 끓어 야단스럽지 내가 살고 있는 이 변두리 동네는 같은 고장이면서도 천리 밖 저승처럼 한적합니다. 태고의 정적이 이러한가 싶었는데, 종일 비행기 탄 것 같은 바로 내 서실 옆의 수년 묵은 냉장고 소리 때문에 어지러워 멀미를 하다가도 어떤 간 큰 사람이 달나라의 계수나무를 한 바퀴 돌고 왔다는 21세기의 전설을 재확인합니다. 자연과 문명이 뒤섞여 뭔가 자꾸 헷갈리는 세상입니다. 그래도 나는 모르는 척 생명보험 몇 개를 들어놓고 오래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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