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길 32

먹는 것이나 입는 것, 잠자는 것을 따져보면 수도원은 감옥과 별로 차이가 없다. 먹이에 가까운 밥을 먹고, 헐벗음 겨우 가리는 옷을 입으며, 누울 자리만 있으면 그게 침상이 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감사와 찬송이 넘치고 한쪽에서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하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자발성’에 주목하고 싶다. 스스로 걸어 들어온 수도원에 비해, 감옥은 질질 끌려 온 곳이라는 점. 그러기에 수도원의 열쇠는 안에 있지만, 감옥 열쇠는 바깥에 있다고 한다. 나가라고 떠밀어도 나가지 않는 곳이 수도원이란 말이다.

수능이 딱 1년 남았다. 이제 여러분은 밤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게 될 것이다. 쉽지 않은 이 문제를 논의하고,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까 내내 고민했다. 그래서 묻는다. 여러분에게 학교는 감옥인가 수도원인가. 다시 한 번 무겁게 묻는다. 여러분에게 담임은 감옥의 간수인가 수도원의 사제인가.

“어떤 날은 감옥인데, 어떤 날은 수도원입니다. 하지만 이왕 할 것, 죄수보다는 수도승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고맙다. 피할 수 없거든 즐기라는 말이 갖는 폭력성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이 폭력적인 세상과 맞설 수만 있다면 그것이 좀 폭력적이면 어떠랴. 할 수만 있다면, 주어진 삶을 즐겨라.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 말이 정치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었다. 그런데 저녁이 즐거워야 하루가 즐겁고, 주말이 즐거워야 일주일이 즐겁고, 겨울이 즐거워야 일 년이 즐겁고, 노년이 즐거워야 일생이 즐겁다는 말로 확장되면서, 그 말은 정치적으로 다가왔다.

아, 저녁이 있고 주말이 있고 겨울이 있고 노년이 있는 삶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우리는 지금 ‘저녁이 있는 삶’을 내려놓으려 한다. 그래야만 ‘또 다른 저녁’이 찾아온다고는 하지 않겠다.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건 노동자만이 아니기 때문.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행복이려니 생각하라.

한 아이가 있었다. 꽤 괜찮은 대학을 합격하고도 재수하겠단다. 당연히 말렸다.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고 1년 뒤 나타났다. 떨어졌단다. 작년에 합격한 대학에 복학하겠단다. 후회되겠구나 하고 물었더니, “아닙니다. 정말 원도 한도 없이 공부해서 조금도 후회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했다.

아까, 대가라고 그랬나. 이렇게 공부하건만 공부한 대가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누군가는 일자리 없이 지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1년, 지독하게 공부하기 바란다. 원도 한도 없이. 그런 기억이 가끔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한다.

담임 회의에서 밤 11시까지 연장 근무를 결정하고 난 날,
이렇게 흔쾌하게 동의해 주셔서 고맙다고
죄도 없는 학년부장이 밥을 샀다.
소주 한 잔을 돌리며
그렇게 우리는 저녁이 있는 삶을 내려놓았다.
- ‘저녁이 있는 삶을 내려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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