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길 34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머물고 싶었다. 뒷산이라도 올라 멍청히 바다나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교직원연수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일정에서 혼자 빠져나오기란 힘든 노릇. 그래서 기념사진을 남기지 않은 여행을 다녀오리라 마음먹고 떠났다. 속옷 두 벌, 칫솔 하나만 달랑 넣고 가방을 비웠다.

버스에, 배에, 다시 버스에, 여덟 시간을 시달리다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제주 올레에 대한 자그마한 기대로 견뎠다. 그렇게 도착한 섬인데, 다음날 아침에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하여 올레 대신 마라도로 실려 갔다. 십여 년 전 여름에 와 본 적이 있는 마라도는 겨울 풍광으로 변해 있었다.

그 섬에는 무엇보다 산이 없어서 좋았다. 악착같이 정상에 올라 비슷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허겁지겁 내려오는 일이 없어서 좋았다. 그래서 칼바람이 귀를 때리는 오솔길을 따라 섬을 두 바퀴 돌았다. 선인장 자생지에 갔다가 백년초 잔가시에 손이 찔리기도 하고, 작은 성당에 잠시 머물기도 하며.

마라도를 떠나 다시 실려 간 곳은 어리목 입구. 아이젠도 없이 어승생악에 올랐다. 해발 1169미터라지만 시작점이 970미터라, 높이를 일컫기에는 미안했다. 조금 가팔랐으나 어린이도 너끈히 오를 수 있을 만큼 길이 잘 닦여 있었다. 하지만 눈 덮인 등산로는 뿌린 비로 무척 조심스러웠다.

제주의 오름 가운데 한라산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다더니, 눈 덮인 한라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내려다보니 작은 백록인 듯 분화구가 얼어붙어 있었고, 둘러보니 텅 빈 산으로 깊은 적막으로 하얀 겨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 어떻게 흰색 하나로 이토록 세상을 찬란하게 단장할 수 있을까.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 야생초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노루귀와 노란 중의무릇, 보랏빛의 앙증맞은 현호색이 어디에선가 연둣빛 봄을 기다리고 있다고 넌지시 알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눈 덮인 조릿대 밑에서는 금방이라도 새봄이 고개를 불쑥 내밀 것만 같았다.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니 드디어 셋째 날. 집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받은 아침이 밝았다. 한라수목원에 실려 갔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특유의 억양이 왁자하였다. 왜 저들은 먼 나라 이곳까지 왔을까. 적어도, 지도가 정확한지 확인하러 온 것은 아닐 터. 부디 안녕하시라, 가벼운 목례를 보냈다.

돌아왔더니 학교는 그대로 있었다. 교문도, 운동장도, 호랑가시나무도, 납작 엎드린 비단풀도 그대로였다. 일상의 감옥이던 학교가 그렇게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삼장법사가 손오공에게 “아무리 날뛰어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 하였다던데, 사흘 동안 학교 안을 맴돌다 돌아온 것 같았다.

내 집 내 방에 가서 하룻밤 푹 자고
동네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은 채, 제주 변방의 기억에 잠시 머물다
그렇게 나는 나의 여행을 끝냈다.
- ‘그렇게 나는 나의 여행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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