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사람 3

그러니까 그때 그 풍경이 나를 찾아왔다. 그 자리에 나를 얼어붙게 하고 생각만으로 지금도 나를 얼어붙게 하는 푸른 고요가 그때 나를 찾아왔다.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된다지만, 그때만 떠올리면 언제든지 나를 소년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그리하여 숨을 멎게 하는 풍경이 아직까지 저물지도 않는다.

열 살 소년에게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서러움이었다. 꽃을 보고서도 괜히 눈물이 흐르는 그런 아픔이었다.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 도시에 있는 그 학교를 가야 한다면서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온 곳이 그 집. 외사촌 형제가 기거하는 방에 더부살이로 시작한 자취 생활에, 나는 늘 혼자였다.

생각해 보면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 곁에 나를 두었어야 했다. 고향 곁에, 친구들 곁에, 그대로 두었어야 했다. 어머니를 떠나 고향을 떠나 무엇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강하지 않던 나를, 육군 장교이셨던 아버지는 소년병으로 보셨을까. 아들에게 하달한 명령은 돌격밖에 없었다.

늦가을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서서, 사직공원을 밤이 이슥하도록 걸었다. 그곳은 어두워서 좋았다. 무섬증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외로움보다 나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정전이 되었다. 예고도 없이 툭하면 전기가 나가던 시절, 천지 어둠을 헤치며 집으로 터덕터덕 돌아왔다.

그런데 골목 입구 가로등 밑에 누가 서 있었다. 가로등부터 전기가 들어와서였을까. 보니 주인집 딸이었다. 나보다 두 살 위, 지나치면서 눈길 하나 주지 않던 그가 푸른 불빛 아래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단정하게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 풍경을 깨뜨릴 수 없었다. 그대로 오래 멈추었다.

숨을 죽인 채 보고만 있었다. 아니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하늘과 땅이 온통 먹밤인데 별 하나가 거기 내려앉은 것 같았다. 아니 망망대해 어둠 속에 돛단배 하나가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거기 멈춘 것 같았다. 책장을 넘길 때만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질 뿐, 정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는지 모른다.

갑자기 온 세상이 환해졌다. 전기가 다시 들어온 것.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는 집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제야 나는 가로등 아래 가서 서 보았다. 오래 서 보았다. 푸른 불빛은 가을 공기를 부드럽게 물들였고, 몸은 어느덧 촉촉한 가을 이슬에 젖어들었다. 아주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해 겨울, 방이 비좁아서 이사를 갔다. 멀리. 그러다 정전이 되는 날은 나도 모르게 그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달리면서 하늘도 땅도 칠흑인 게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다 보면 전기가 들어오기 일쑤. 한 번도 그를 그 별빛을 그 푸른 고요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돌아와서는 항상 앓았다.

고등학교를 갔는데 그의 동생이 동창이 되어 있었다.
천사처럼 착한 내 친구. 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여수에 왔더니 그의 동생이 있었다.
그래도 입을 다물었다. 다시 수십 년이 흐르고,
몇 해 전 많이 아픈 적이 있다.
안부 전화를 한 그의 동생에게
그는 어둠이 불러 내린 별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더니
나는 그때 너무 어두웠다고 했더니
전화기 너머에서 웃었다. 그는
여전히 푸르게 살고 있다고 했다.
- ‘어둠은 가끔 별을 불러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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