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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자고 일어나면 아, 푸른 그날들정호경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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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15  10: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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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면 언제나 아침입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새롭습니다. 어제 아침은 마른 나뭇가지에 내리는 보슬비에 눈이 간지럽더니 오늘 아침은 우중충하게 바다를 덮은 구름 때문에 날마다 만나는 갈매기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봄이 와도 불쑥 오는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 눈치 보는 새댁처럼 조심스럽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제 잘났다고 세상이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도 봄이 온다니 내 가슴은 괜히 부풉니다. 보리밭에 달래 움이 돋는지 발바닥이 간질간질합니다.

여수에서는 거문도에 맨 먼저 봄이 옵니다. 그건 무엇으로 아느냐고요. 해마다 이맘때면 파릇한 거문도 봄쑥이 꼬부랑할머니의 바구니에 담겨 고깃배를 타고 건너오니까요. 시장에서 만난 이 빠진 할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는 우리 딸이 그런 일 하지 마라고 하지만, 이것이라도 해야 나가 묵고 사요.” 남쪽 갯가의 봄은 이 빠진 할머니의 한숨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옵니다.

봄은 실수의 계절입니다. 괜히 마음이 들떠서 그럽니다. 화장실에 소변보러 들어갔다가 괜한 세수만 하고 나와서는 자기 직전에 먹으라는 그 독한 감기약을 모르고 아침에 한 봉지 먹었더니 속이 쓰려서 소화제를 찾는다는 것이 서두르다가 그만 변비약을 먹어버렸어요. 오동도 벼랑의 그 붉은 색깔의 동백꽃 탓인가요. 봄은 실수의 계절입니다.

추억이란 말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인데, 옛날 내 중학시절의 사진첩을 보면 친구들과 어깨동무한 사진 아래에는 어김없이 ‘추억을 생각하면서’라는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뜻이 중복되어 어색하고 유치한 표현을 당장 바로잡아 주고 싶지만, 나는 오늘 중학시절의 그 진솔하고 근사한 문구를 새삼 추억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주차위반 단속이 심해 불안합니다. 길가에 세워 뒀다가 또 지난번처럼 견인차로 끌고 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집사람이 걱정을 하기에 낡아빠진 차의 폐차 비용 안 들어서 좋으니 차라리 끌고 가버리면 좋겠다고 말하면서도 많은 세월을 나와 동고동락한 그 녀석이 불쌍해서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나는 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고 했더니 조수석에 앉아 있던 집사람은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오늘 오후 이곳 바닷가 해양공원을 산책하는데, 날씨가 더워서인지 구두가 자꾸 헐떡입니다. 내 앞을 걸어가는, 어떤 늙은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헐떡이는 동행인을 만나 반가웠지만, 생판 모르는 노인에게 악수를 청할 수도 없어서 그냥 웃음을 참고 뒤따랐습니다. 젊었을 적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구두가, 나이가 들면서 자꾸 헐떡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한평생 바쁜 걸음으로 나를 여기저기 날라다 주느라 고생이 많았던 내 발을 생각합니다. 목욕탕에 앉아 내려다본, 내 낯선 발을 보고 나는 비로소 그 까닭을 알았습니다. 건어물상에서 본, 바싹 마른 양태 두 마리가 처량한 모습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이 피곤한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헐떡이는 구두와 함께 나의 여생을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학술논문이 아닌, 무슨 금전관계 서류를 꾸밀 때는 오래되어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막도장을 챙깁니디. 값비싼 상아도장이나 수정도장으로 나의 신뢰도와 권위를 내세우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자는 요즘의 유행어인 ‘개방과 소통’은 말만의 사치에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입는 양복 상의에는 한복에는 없는 속주머니가 여기저기 달려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감추어야 할 비밀이 그렇게도 많은가요. 집문서가 그러하고, 장판 색깔의 5만원짜리 지폐가 또한 깊은 속주머니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은 거기에다 감추지 마세요. 보기에 너무 촌스럽고 남부끄럽습니다.

인간은 보기와는 달리 ‘불생불멸하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에 의문이 있었었는데, 어젯밤 꿈에 먼저 저승으로 떠난 친구가 나타나서 배가 고프다면서 장어탕을 좀 사 달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숟가락을 들자마자 단숨에 먹어치우고는 다음에 오면, 그 소문난 게장백반도 맛 좀 보게 해 달라면서 손을 흔들고는 떠났습니다. 요즘 내 경제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다음에 또 만나자는 것을 보면 ‘인간의 생명은 영원히 불멸한다.’는 보르헤스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오늘 토요일 오후 우리 동네 해수탕에 목욕하러 갔더니 초등학생들이 떼로 몰려와 해수욕장인 줄 알고 다이빙을 하는 놈, 물속에서 씨름을 하는 놈들로 시끄러웠습니다. 나는 정신을 잃고 두꺼비처럼 멍하게 앉아 눈만 껌벅이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옛날 내 어린 시절 놀이터는 마을 뒤 보리밭 너머에 있는 시냇물의 깊은 웅덩이였는데, 요즘 아이들의 놀이터는 널찍하고 시설 좋은 도심의 대중목욕탕입니다. 지금 이 아이들이 나만큼 늙어서 그 대중목욕탕을 다시 찾아갔을 때, 따끈한 탕 속에 몸을 담그고 앉아서 흘러간 옛날의 무엇을 추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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