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정호경

냉장시설이 잘 돼 있는 요즘에는 서울을 비롯한 어느 대도시에서도 사계절의 풋것들을 밥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잎사귀나 뿌리에 아직도 시골의 흙냄새가 남아 있는 신선한 풋것들과의 만남은 아무래도 이것들이 발 벗고 자란 제 고장 시골 장터일 것이다. 시끄럽고 어지러운 서울생활에서 벗어나 내 어린 시절의 고향은 아니지만, 고향 가까운 남녘 어촌으로 내려와 살고 있다. 갯벌의 바지락, 꼬막 등 조개들이며 게 혹은 마을 주변 바닷가에 자리를 잡아 살고 있는 볼락, 노래미 등과 아침저녁의 식탁에서 자주 만나다 보니 이제는 이것들과 정이 들어 내 늘그막 인생이 그저 즐겁기만 하다.

아직도 찬바람이 씽씽 불어오는 늦겨울부터 이른 봄의 아침 저잣거리에 시골 할머니들이 바구니에 가득 담아 이고 오는 배추로 그 시기가 조금 빠른 놈이 ‘동冬배추’이고, 봄 들어 나오는 놈이 ‘봄동’이다. 우리는 이것들의 종류와 시장에 나오는 시기는 상관없이 싸잡아 ‘봄동’으로 통칭하며, 주부들은 늦겨울과 새봄의 풋것들이 싱그러워 한 보자기씩 싸들고 간다. 그런데 이것들을 내 나름으로 구태여 구별하여 설명해 본다면 ‘봄동’은 이름대로 봄에 동이 올라 파릇하게 자란 놈인데, 이를 맵고 고소한 양념으로 주물러 만든 겉절이는 봄의 입맛을 돋우는 싱싱하고 향긋한 배추이다. 이와 비슷하면서 종자도 맛도 다른 ‘동冬배추’는 가을의 김장배추로 상품가치가 없는 못난이는 뽑지 않고 그대로 밭에다 팽개쳐 둔다. 그래서 바람 찬 겨울 난들에서 두세 달을 모진 추위와 싸우며 시달린 탓인지 크고 작은 잎들이 모두 곰보처럼 쪼글쪼글 얽어서 볼썽사나운 꼴을 하고 있다. 늦겨울의 못난 그 녀석들의 꼴이 불쌍하게 보이다가도 한편으로는 그 강인한 인상에 함부로 다루기가 조심스럽다.

나는 타고난 채식체질이어서 쇠고기나 돼지고기보다는 ‘봄동’의 향긋한 겉절이를 좋아했는데, 여수에 내려와 살면서부터는 한겨울의 모진 추위를 겪고 나온 ‘동배추’에 맛을 붙여 이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봄동’은 따스한 봄볕을 받아 곱게 자란, 공주 같은 배추라고 한다면, ‘동배추’는 이름 그대로 정품正品에서 소외된 겨울배추이니 한겨울의 손발이 얼어터지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견딘 녀석이고 보면, 혹한과 역경에 버티는 저항력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김장배추와는 달리 고소하고도 이가 시린 겨울 맛에 홀려 자주 찾기는 하지만, 내 속뜻은 맛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왕 시작한 내 평생의 농사인, 좋은 수필을 단 한 편이라도 더 남기고 가기 위해서는 우선 오래 살고 봐야 할 일이기에 허약한 내 심신의 건강을 위해 저항력이 강한 이 ‘쪼글배추’의 덕을 좀 보자는 것이 솔직한 내 속셈이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도 겨울 휴가 때면 바다낚시를 하러 종종 내려온다. 그럴 때는 으레 숙모님과 단 둘이 살고 있는 사촌동생 집에 머무르면서 3,4일을 쉬었다 가곤 했다. 사촌동생은 직장도 걷어치우고 한평생을 낚시로 일관하고 있는 자유인이고 방랑객이다. 나와는 같은 낚시취미로 오다가다 자주 만나다 보니 서로의 기호식품까지도 속속들이 알게 되어 겨울철에 이곳으로 낚시하러 오는 날의 밥상에는 여지없이 그 험상궂게 얽어빠진 동배추가 밥상위에 올라 있으니 나는 또 다른 고향친구를 만난 듯 감격한다. 이것의 이 고장 명칭을 알고 싶어서 물어보니 숙모님도 동생도 우물우물 더듬거리고 있기에 내가 얼른 받아 그 쪼글쪼글한 특징대로 부르기 쉬운 ‘쪼글배추’로 명명命名한 뒤부터 우리끼리는 그 이름으로 일상 통하고 있다.

이곳에서 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기호식품은 이것 말고 또 있다. 역시 혹한의 겨울철에 나오는 해조류인데, 다름 아닌 바다의 산소라고 하는 새파란 ‘돌파래’와 검푸른 ‘돌미역’이다. 이곳 사람들은 위에서 말한 ‘쪼글배추’와 ‘파래’로는 예외 없이 김치만 만들고, ‘미역’은 국거리로만 쓰고 있다. 그런데 내 어렸을 적의 경남 하동지방에서는 바다에서 캐낸 파래나 미역으로 쌈을 싸 먹었으니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구경거리로 우습기도 했겠지만, 그런 가운데 시험 삼아 이것들로 쌈을 싸 먹어본 내 주변 사람들은 상추나 배추와는 또 다른 바다의 신선한 맛에 감탄한다. 하지만 모든 쌈 맛의 근본은 양념장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봄철의 상추쌈에는 밥 위에 걸친 통정어리가 맛을 내지만, 배추건 상추건 호박잎이건 그것들의 쌈 맛을 내는 것은 역시 고추장과 된장을 섞어 반죽한 ‘막장’이거나 혹은 ‘멸치젓장’으로 만든 매콤하고 고소한 양념장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밥맛이 떨어지면서 어느 날 조용히 우리는 이승을 떠난다. 나에게 밥맛을 돋우어 힘을 안겨주는 것은 한우의 등심도 삼겹살도 아닌 혹한의 겨울 밭에서 추위를 견뎌낸 ‘쪼글배추’와 바다에서 방금 뜯어온 ‘돌파래’, ‘돌미역’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파란 색깔의, 그 뜨거운 불길을 만나기 전의 풋것들이다. 그래서 해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나는 혹한에의 두려움보다 생으로 쌈을 싸먹는 자연 그대로의 풋것들을 만나는 즐거움에 오히려 내 가슴은 부푼다.

사람의 얼굴이나 옷이나 시간이 지나면 색깔이 변하는데, 오늘의 하늘과 바다와 들녘의 색깔은 내 어렸을 적보다 더 푸르고 곱다. 허리가 굽고, 눈자위가 짓무르도록 오래 산다는 것은 남부끄럽고 슬픈 일로만 여겨 왔는데, 오늘의 이 푸른 하늘과 바다와 들녘을 두고 일찍 떠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나는 이 푸르고 향긋한 것들 속에서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앉아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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