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여수고등학교 교사

가지 말았어야 했다.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나를 지우고, 그림자가 되어 어둠으로 스며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외삼촌이 끌려가서 묵사발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외갓집으로 불려가서 몹쓸 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물도 못 넘기며 계신다는 말을 듣고,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갔다.

새삼 그 시절을 떠올려 무엇하랴만, 사복들이 들이닥쳐 방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하숙집 아줌마의 다급한 전갈을 듣고, 아직 이사한 건 모르는구나 자취집에 숨어들었다. 태울 것 태우고 버릴 것 버리고, 다시 못 올 그 방에 누워 파랗게 질린 몸을 잠시 위로하였다. 이윽고 새벽, 집을 나섰다.

어딘가 숨어야 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전화하기 힘든 상황. 감시의 눈길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 내게 손길을 내밀어 줄 사람, 위험을 감수할 만한 그런 사람이 절실했다. 떠오른 이가 정희준, 고등학교 선배였다. 전화했다. “형, 접니다.” 형은 말없이 약속 장소로 나왔고, 외딴집에 나를 숨겨 주었다.

이러다 잡히면 여럿 힘들게 하겠구나 하는 판단이 서자, 며칠 뒤 그곳을 떴다. 세상에서 가장 모진 바람이 지나간지라, 거리는 살벌했다. 총학생회 건설에 참여하고, 지역총학 이름으로 나온 열몇 개의 유인물을 쓰고, 5월 16일 도청 광장에서 횃불시위 사회를 보고. 그런 나를 세상은 조여오고 있었다.

어찌어찌 흘러든 곳이 여수. 참 좋은 분, 큰누님과 혼담이 오가던 분의 좁은 거처에 나를 숨겼다. 그런데 불쑥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시골 면장이신 외삼촌의 참상을 전하면서 자수를 권했다. 풍랑이 조금 잦아지기를 기다렸으면 했지만, 어머니의 참담함에 이르러서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동의했다.

그날 밤늦게 경찰서로 출두했고, 다음날 새벽 영산강하구언개발공사라는 이름이 걸린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었다. 터널은 길고 어두웠다.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유인물에 적혀 있는 문장 하나에 한 대씩이나 되었을까. 그들은 내 살과 뼈의 사상을 의심했고, 의심했고, 또 의심했다.

종일 비가 왔지만 무지개 하나 걸리지 않았고, 종일 바람이 쳤지만 풀꽃 냄새 하나 실려 오지 않았다. 괴로움의 부피와 무게를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몸과 함께 무너졌다. 걷는 것도 힘들게 되자, 그들은 나를 군인병동으로 옮겼다. 마음이 울지 못하면 몸이 운다더니, 몸이 길게 울었다.

어찌어찌 살아 풀려난 뒤, 어머니는 날마다 우셨다. 얼병 든 데는 개똥이 좋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개똥을 주워다가 가마솥에 볶았고, 나는 그 물을 마셨다. 사람 똥물이 어혈 풀리는 데는 좋다는 말을 듣고, 옛날식 뒷간에다 대나무를 담가 마디마디 스며든 똥물을 토가 나오도록 먹였다.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참 예쁘다.
짜디짠 눈물에 씻겨 그렇게 맑은 것을 토해 내는 것을 보면 참 예쁘다.
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다시 낳으셨다.
- 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다시 낳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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