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수필가

아버지의 육남매 형제자매 내외가 한 사람 한 사람 저 세상으로 떠난 지 10년이 넘도록 아직 여기 홀로 남아 외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이 바로 올해 아흔두 살인 막내 숙모님이시다.

몸이 깡마른 사람이 장수를 한다고들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예외도 있는 모양이다. 막내 숙모님은 시집 올 때부터 몸이 절구통 같아서 방에 앉아 있을 때도 두 사람의 면적을 차지했었고, 외출할 때도 걸음이 더디다고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이맛살을 찌푸리던 숙부님은 결국 절구통 숙모님을 버리고 일제 때 만주로 도망을 가서 일 년이 넘도록 소식을 끊어버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아버지는 육남매의 맨 위여서 어느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든 나이가 어린 막내 숙부님이 안쓰러워서인지 그의 가족과 향방을 함께했다. 장형으로서의 책임감이 언제나 부모 대신이어서 막내의 울타리 역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여 마지막 종착지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다.

여순사건 직후 순천에서 이곳 여수로 옮겨와서 아버지는 얼마 뒤 고향인 하동으로 다시 옮겨 가고, 막내 숙부님은 이제 많은 가족을 거느린 떳떳한 가장이고 보니 언제까지나 품안의 아기일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오랜 세월을 이 자리에 주저앉아 살다가 이제 숙모님 혼자 외롭게 남아 삶의 끝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다.

숙모님은 몸집과는 달라 두뇌 회전이 빠르고 기억력도 좋았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어버이날에 점심이나 대접하려고 모신 자리에서는 으레 어른들 모시고 시집살이하던 지난날의 이야기나 내가 어렸을 적의 이런저런 일들을 어제 일처럼 환히 되짚어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곤 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며칠 전의 일도 기억을 못 하면서 어렸을 적의 기억은 너무나도 환하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전혀 그 반대일 것 같은데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장성한 아들딸들은 모두 제각기 살길을 찾아 객지로 떠나버리고 제자리에 남아 함께 살고 있는 녀석은 낚시로 한평생을 보내고 있는 둘째 아들이다. 그는 애당초에 부자유스럽고, 규칙적인 직장생활이 적성에 맞질 않아 1년 남짓 나가다가 그만둬버리고, 낚싯대를 짊어졌다 하면 며칠이고 외딴 섬에 죽치고 앉아 돌아올 줄 모르는 방랑객이자 자유인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낚아온 고기들을 깨끗이 다듬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아침저녁 제 손으로 지은 밥에 고기반찬으로 그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효자이기도 했다. 이렇게 단 둘만의 생활을 십 년 넘게 하다 보니 이제는 서로가 의지하고 믿는 기둥이 되어 모자간의 믿음과 사랑은 하루도 떨어져 살 수 없는 별난 짝이 되어버렸다.

숙모님의 낚시꾼 아들인 내 사촌동생은 하루가 멀다 하고 스스로 혹은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바다로 떠나면서도 항상 그의 어머님에 대한 긴장감, 불안감은 떨칠 수가 없었다. 왜냐 하면 어제오늘 들어 치매기가 생겨 가끔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되도록 집에서 멀리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하루는 염려했던 사건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날 뜻밖에도 하동 친정집 조카한테서 할머니를 보호하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 와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달려갔다고 한다.

숙모님에게는 무료한 나날의 방구석이 저승보다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의 감시를 벗어나 무작정 집을 나와 예전에 자주 다니던, 집 가까운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리가 멀쩡한 젊은이들의 걸음으로도 20분은 족히 걸릴 시장과는 정반대 방향인 시외버스 정류장 옆을 지나다 문득 친정 고향인 하동이 기억났던 모양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금방 한 말도 기억을 못 하고 앉은 자리에서 세 번 네 번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어린 시절의 고향인 하동은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었다니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정신이 맑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숙모님은 나물을 다듬으면서 흥얼거리던 동요다.
버스터미널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올라탄 것이 광양 가는 버스였던가. 그곳에서 내리기는 했지만,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는 노파를 본 순찰경찰관이 파출소로 데려다가 사는 곳을 묻는 과정에서 호주머니 속의 얄팍하고 허름한 수첩을 발견하여 여기저기 전화를 하다 보니 요행히 친정집 조카가 걸려 나왔다는 것이다.

내가 서울생활을 마치고 이곳으로 내려오게 된 것도 어린 시절의 정든 산천이 그리워서이다. 거기에는 진달래가 고운 나지막한 산이 있었고, 그 옆에는 붕어 세끼들의 장난질이 시끄럽던 개천이 있었고, 쑥과 달래의 향긋한 봄 냄새가 있었기에 이것들을 잊지 못해 나는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시집의 동서들, 시누이들과 한평생을 북적거리다가 바람처럼 모두 떠나버린 허전한 둥지에서 숙모님이 찾아갈 곳이 어디던가.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잠재해 있던 어린 시절의 그 정든 고장이 갈길 잃은 숙모님을 손짓해 불러들인 것은 아닌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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