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룡 자유기고가(해군대령 예편)

▲ 남태룡 자유기고가(해군대령 예편)
시인 T.S 엘리어트는 그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읊었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의 4월은 너무나 잔인했습니다. 꽃 피는 계절에 우리의 젊은 꽃봉오리들을 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잔인하게 우리의 가슴을 할퀴어 놓았습니다.

4월 16일에 우리는 날벼락과 같은 소식을 접해야 했습니다. 경기도 안산시의 단원고 학생들을 태우고 인천에서 출항해 제주도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 바다에 침몰하고 만 것입니다. 과적에 정원 초과, 안전 점검 미비, 운항 미숙, 선장과 승무원들의 무책임과 업무 태만이 부른 비극입니다.

우리는 1912년 대서양에서 안개 속의 빙산과 충돌해 침몰한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 호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을 기억합니다. 그는 최후까지 승객의 탈출과 구조에 최선을 다 하다가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이것이 선장의 책임이며 의무인 것입니다. 그 사고에 선장의 과실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는 이렇게 선장의 할 도리를 다 함으로서, 그때 그는 죽었지만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선장은 배가 기울고 가라앉자 맨 먼저 배를 탈출해 태연히 구조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꽃봉오리들의 울부짖음을 모른 척 했습니다. 선장의 나이로 보아 그 꽃봉오리들은 그에게 아마 손자뻘이나 증손자뻘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렇지 어떻게 선장의 책임이자 의무인 승객의 구조 노력을 포기하고 도망칠 수 있을까요? 그는 책임과 의무, 양심을 버렸습니다. 타이타닉 호의 스미스 선장의 경우와 비교할 때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세계를 향해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은 직책이 주어지면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유의지가 주어진 사람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속성도 물론 가지고 있지만 보통은 책임을 다하는 선택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보통 사람의 양심이며 인품입니다. 그런 양심과 인품이 발휘될 때 그에게는 응당한 명예와 영예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세월호 선장의 선택은 비정상이며 안타깝기 그지없는 노릇입니다. 그는 최소한 죽든 살든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구조 노력에 최후까지 매달렸어야 옳았습니다.

저는 제 해군사관학교 생도 시절을 떠올립니다. 생도 시절 4년 내내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암송하던 생도훈(生徒訓)이 있었습니다. ‘귀관은 사관생도로서 최고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 장차 포연탄우(砲煙彈雨)의 생사(生死) 간에 부하를 지휘할 수 있는가?’ 이는 사관생도를 훈육하는 키워드(key word)이지만 생도에게는 장차 부하를 거느려야 하는 지휘관으로서, 동시에 국민의 생명과 재산, 국가의 안보를 지켜내야 할 역군으로서 몸을 바쳐 헌신하고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그것을 다짐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 시절은 한 참 지났습니다. 그렇지만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의 의무 태만을 보면서 그때의 생도훈을 떠올려 제 자신을 먼저 새삼 성찰하게 되며 우리 사회에서 뭔가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의 책임 완수와 분발을 기대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가장으로서든. 사회의 여러 분야 공인으로서든, 정치인으로서든. 세월호의 선장과 같은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는 사람이 돼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고로 변을 당한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지쳐 쓰러지도록 통곡하고 온 국민이 우울해 하는 가운데서도 지방 선거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출마자들에게 한 마디 묻겠습니다.

그대들은 진정 입신양명(立身揚名)과 실리를 챙기려 하는 추호의 사리사욕이 없는 의로운 봉사와 헌신의 마음으로 출마했는가? 말하자면 안중근 의사가 말한 것처럼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애꿎은 배가 빚어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인재(人災)이며 우리 어른들 모두의 잘못이고 특히나 정파 싸움질에나 신경 쓰면서 세월호 참사를 막는 것과 같은 실용적 시스템을 만들고 작동되도록 하지 못한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느끼기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요즘 저 역시 애써 가슴을 억누르고는 있습니다만 솔직히 통곡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니 금이야 옥이야 키워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딸을 잃은 학부모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평생 그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될 학부모들인지라 누가 뭐라고 위로한들 위로가 되겠습니까, 이웃이 불행해서는 결코 내가 행복할 수 없는 법입니다. 가슴 녹아내리는 학부모들의 슬픔을 내 슬픔, 우리 모두의 슬픔으로 받아들여 그들이 생의 의욕을 잃지 않도록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데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울어서 그들이 위로를 받는다면 우리 모두 목 놓아 울어라도 봅시다.

잔인한 4월이 찬비가 내리는 가운데 무심하게 지나갑니다. 다시는 이런 사고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젊은이들의 정신과 눈동자가 살아 있는 한 그 민족은 영원히 살아남 는다’다고 했습니다. 굳이 이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세월호 참사로 너무나 큰 국가적 손실을 입었으며 미래에 대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도 우리는 우리 젊은이들 모두를 다 내 자식처럼 보호하고 잘 키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부른 것과 같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책임 의식 부재와 국가 시스템의 허술함을 털어내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에게 지면으로나마 다시 한 번 애도를 표합니다. 유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잃지 않기를 빕니다.
 

저작권자 © 뉴스탑전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