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수애양원 김인권 원장.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 얼굴만 보아도 위안이 되고 감사의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그가 살아온 삶을 닮고 싶은 생각이 들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 만난 여수애양병원의 김인권 원장님이 그렇습니다. 그분의 첫 인상은 너무나 선했습니다. 차분한 목소리, 부드러운 미소, 그가 전하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 저에게는 진한 감동과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한센병 환자들이 참 좋습니다. 그분들과 한 번 친구가 되면 평생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순박할 수가 없어요. 저를 간절히 원하는 분들과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어서 제가 오히려 그분들에게 고맙지요.”

김인권 원장님은 1969년에 서울대학교 의대에 입학해 1975년에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인턴 시절에 6개월간 소록도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기본적인 치료조차도 받지 못하는 그곳 환자들을 보면서 1980년에 고흥군 소록도에서 공증보건의로 근무를 자원했습니다.

그렇게 김인권 원장님은 한센병 환자와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3년의 소록도에서 공중보건의를 마친 뒤, 그는 의사로서 본격적인 진로를 결정하기 위한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마침 그 때에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교수 자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민은 더욱 깊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서울대병원이 제의한 교수직을 뿌리치고 1983년에 시골의 작은 병원인 여수애양병원의 외과 과장으로 부임해 왔습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 일이 제 앞에 와서 그것을 제가 선택한 것뿐입니다. 남들은 왜 이렇게 시골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느냐고 하지만 저는 그 때, 그 선택에 대해 조금도 후회가 없어요.”

사모님이 반대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왜 반대하지 않았겠어요. 지금은 근무 여건이 많이 좋아졌지만, 제가 부임해 올 때는 말도 못하게 힘들었거든요. 그렇지만 아내도 저의 생각에 동의를 해줬어요. 참 고마운 사람이지요.”

▲ 전국을 유랑하던 한센병 환자들.

여수애양병원의 역사는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 미국 선교사인 포사이트가 길에서 여자 한센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 당시는 한센병 환자를 보면 ‘문둥병 환자’라고 해서 무조건 돌을 던지면서 괴롭히던 시절이었습니다.

포사이트는 그 환자를 말에 태워 당시 광주의 윌슨진료소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애양병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수많은 한센병 환자들이 병원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애양원의 역사박물관에 가면 그 당시에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평생을 바쳐 헌신한 수많은 천사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플 박사님의 헌신도,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봉사도, 치료약과 의료장비와 건물을 지을 성금을 보내주신 고마운 분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센병 환자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냈다는 손양원 목사님의 기록도 적혀있습니다.

그렇게 외국의 원조로 시작한 애양원이었습니다. 변변한 시설과 장비도 없이 어렵게 시작한 시골의 작은 병원이었지만 그동안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와 소아마비 환자의 치료와 재활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미얀마와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 등의 의사들을 훈련시키고, 이들 나라에 지속적인 의료지원과 무료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들이 받은 은혜를 이제는 우리보다 어려운 나라에 되돌려 주는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지요.

국내 최고 인공관절 수술의 대가
장애 교정과 고관절 및 슬관절의 ‘인공 관절치환술’과 ‘척추질환’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의 대표 명의(名醫)로 인정받고 있는 여수애양병원은 김인권 원장님은 요즘도 하루에 20~25명까지 수술을 하고 있습니다. 겨울철에는 이보다 30~50% 더 많은 환자를 수술합니다.

이렇게 바쁜 일과 속에서도 9년째 중국 옌볜을 찾아 우리 동포 등에게 고관절 무료 시술을 해주고 있고, 2003년부터는 베트남 등의 어려운 나라들을 찾아 의료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사랑의 인술을 세계 곳곳에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천사 같은 이분이 바로 여수애양병원의 김인권 원장님입니다.

“우리 병원은 다른 병원에 비해 병원비가 저렴합니다. 그렇다고 수술에 쓰이는 재료를 저렴한 것으로 사용하지는 않아요. 부족한 비용수가는 그만큼 수술을 많이 해서 어느 정도 메워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일종의 ‘박리다매’라 보시면 됩니다.”

김인권 원장님의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애양병원에 오시는 환자들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에요. 그리고 다른데서 치료를 받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마지막 종착역으로 우리 병원에 오는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치료비용을 최대한 낮추고 오는 환자들은 무조건 받는다는 것이 저희 병원의 원칙입니다. 이것이 우리 병원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애양병원에는 특진도 없고 예약도 없습니다. 무조건 대기 순서대로 진료를 합니다. 그리고 수술은 나이가 많은 환자부터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직위가 높다고, 돈이 많다고 치료의 우선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어르신부터 먼저 보살피는 것이 애양병원의 원칙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고 우리 사회를 한 걸음 더 진전시킬 수 있는 진정한 롤 모델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직위가 높은 사람일까요?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본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인권 원장님 같은 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보장된 자리를 포기하고 평생을 바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사람. 그러면서도 그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 병원에서 만난 어느 환자는 “우리는 원장님 얼굴만 봐도 통증이 사라져요.”하고 말합니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환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면서 “오늘은 어떠세요? 견딜만 하세요? 오늘은 좋아 보이네요.”하면서 환자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의사. 그처럼 무서운 진정성으로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아직껏 힘과 정성이 모자라서 온전히 희생하는 이 분의 삶을 감히 따라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높이 우러러보고 살아갈 만한 인물의 삶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뜰이 밝은 등불을 켜둔 것처럼 환해집니다.

철저히 자신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완성하여 가는 삶. 김인권 원장님 같은 분들이 우리 곁에 있기에 이 세상은 이만큼이라도 유지가 되고,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만한 세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자로 태어나서 이렇게 마음 가는 대로 한 번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며 웃어주는 김인권 원장님의 삶을 보면서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거듭 깨닫게 됩니다. 우리 곁에 있어 주어서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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