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일기술산업(주) 박동화 대표.

로딩암 제작·유지보수 전문 업체인 제일기술산업(주) 박동화 대표(52)는 1998년 IMF 외환위기로 수많은 기업들이 경영난으로 사라질 때 회사를 설립했다.

한 때 회사 경영이 어려워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시련과 좌절을 겪었지만 ‘로딩암 기술을 국산화해 해외 시장에 내놓겠다’는 명확한 목표와 사랑하는 가족, 직원들이 곁에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직원 15명을 거느린 중소기업인이 된 지금, 미국·일본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는 로딩암을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해 그들과 경쟁하겠다는 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직원들과 함께 피어오르고 있는 그의 인생수첩을 들여다본다.

로딩암 제작·유지보수 전문 업체
해외 시장 진출 위해 연구개발 투자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국내의 수많은 기업들이 사라졌다. 당시 지인과 동업을 했던 박동화 대표의 회사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이 회사에서 독립한 박 대표는 같은 해 여수국가산단 대기업에 수입 배관 자재 납품과 외국산 로딩암 등을 유지보수하는 업체인 ‘제일기술산업(당시 개인회사)’을 설립했다.

로딩암 제작·유지보수는 회사의 대표 브랜드였다. 하지만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로딩암은 수급의 어려움과 고비용 지출이 중소기업엔 적잖은 부담이 됐다.

로딩암(Loading Arm)은 선박이 부두에 접안할 때 배와 수송관을 연결해주는 장치로 원유를 육지로 수송할 때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다. 로딩암은 밀물과 썰물 때 완충작용을 통해 배를 보호하고 원유를 안전하게 이송하는 역할을 한다.

박 대표의 도전은 ‘이런 설비를 왜 국내에서 만들지 못할까?’하는 의문에서 시작됐다. 2003년 로딩암 국산화를 위한 본격적인 연구개발에 들어간 제일기술산업(주)은 로딩암 제작·유지보수 전문 업체로 거듭나기 시작해 2006년 법인으로 전환하고 여수국가산단 내에 제작 공장을 설립했다.

2004년 마린 로딩암(Marine Loading Arm)을 국산화에 성공한 제일기술산업(주)은 2005년 LG화학 중흥부두 매뉴얼 로딩암, 석유화학부두 마린 로딩암 제작 설치 등 여수국가산단 내 기업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중소기업의 기술력이 외국산 로딩암의 유지보수 및 납품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한국산업안전관리공단이 조성하는 부두에 제일기술산업(주)이 진출하면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 여수국가산단 내 GS칼텍스, LG화학, 한국석유공사, SYTT, 금호피앤비, 금호석화, 여천NCC, 대림산업, 한화 등 대형 유조선이 접안하는 원유부두의 사용되는 로딩암에 대한 유지보수를 맡고 있다. 현재 이들 원유부두에는 외국 기술로 만들어진 로딩암이 사용되고 있다.

▲ 로딩암을 연결해 원유선과 육지의 수송관을 연결하고 있다.

로딩암은 미국, 독일, 일본, 네덜란드 기업들이 메이저급 기술을 갖고 있으며, 직접 석유 시추를 하거나 시추 기계를 만드는 세계적인 기업들이다. 이런 세계적인 기업들이 만든 로딩암에 대해 유지보수를 맡을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기술력으로는 소형 유조선용 로딩암은 제작이 가능하지만 28만t급 등 대형 유조선용 로딩암은 국내 기술로는 제작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 기술로 만들어진 로딩암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연구용 로딩암이 필요한데 이마저도 구하기 어렵다. 기술 보안이 철저할뿐더러 연구개발용으로 구입하는데도 수십억 원에 달하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3년 후 해외 시장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인력과 기술 노하우가 절대적으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에 연구개발(R&D)에 지속적인 투자는 물론 우수한 품질과 새로운 기술개발, 영업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에 주어지는 ‘이노비즈’ 인증을 획득했으며, 연구개발을 위한 기술연구소도 설립했다.

중소기업의 여건상 관련 장비를 모두 갖추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기, 유압, 용접, 스트럭처 등의 업체가 컨소시엄을 이뤄 작업을 진행한다.

제일기술산업(주)은 로딩암 외에도 배를 잡아주는 QRH(선박계류장비), 로딩암과 관련된 기계설비 등의 해양기자재를 국산화하는데도 주력하고 있다.

일자리 부족? 중소기업은 인력이 부족
중소기업-유관기관과의 협력 중요해

중소기업을 경영하면서 가장 큰 애로사항이 무엇인지 물었다. 박 대표는 “기술 회사의 특성상 업무를 정확하게 숙지하는 데 최소 1년이 걸린다. 3년 정도 지나야 회사 시스템에 맞는 인력으로 키워지는데 끈기 있고 도전하는 젊은 인재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중소기업 여건상 연구개발(R&D) 인력은 물론 모든 분야에 인력을 여유 있게 채용할 수 없기 때문에 중도에 핵심 인력이 회사를 관두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제일기술산업(주)도 최근 3년간 30여명을 채용했지만 대부분 중도에 회사를 그만뒀다.

박 대표는 “다들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하는데 중소기업은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청년 구직자들을 면접 해보면 의욕 저하는 물론 목표의식도 부족한 것 같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와 비교한다. 유망 있는 중소기업에 취업해 자신의 실력을 쌓고, 회사를 키워보겠다는 도전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별로 없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이어 “젊은 인력들 대부분이 좀 더 편하고, 적게 일하고 급여는 더 많이 받는 기업을 선호한다. 처음부터 100% 만족하는 회사는 이 세상에 없다. 유망 기술력과 성장잠재력이 있는 중소기업은 생산관리, 영업, 기술 개발 등 여러 분야를 섭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면서 인생 설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중소기업이 자체 연구개발(R&D)하는데도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여수산단에 대기업이 많다보니 대기업 위주의 정책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다”며 “노동부, 여수시, 지역대학 등이 연계한 중소기업을 위한 실질적인 협력 체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해 설립한 연구소의 경우 2010년부터 전남대와 순천대 등과 산학협력을 추진했지만 무산돼 결국 목포대와 산학협력을 했다.

회사 부도 등으로 자살도 생각
가족과 직원들이 있어 극복

정년이 없는 회사·기술 국산화해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할 것

제일기술산업(주)은 지난해 경영혁신과 고용창출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로 ‘여수시 자랑스러운 기업인’에 선정되는 등 탄탄한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으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데 어려운 고비도 많았다. 1998년 막상 사업을 시작했지만 3년여 간 일이 없었다. 새벽 6시에 처갓집 방앗간으로 출근해 떡을 만들기도 했다. 집에 생활비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렇게 어렵게 버텼지만 3년 만에 부도를 맞았다. 집에는 한동안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실의와 좌절에 빠졌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젊으니까 다시 한 번 해보자”고 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 힘이 됐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했다. 이때 함께 한 여직원은 지금까지 근무를 하고 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때 회사가 위기에 봉착하면서 또다시 좌절해야 했다. 설계를 담당하던 처제까지 내보낼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3개월 간 이곳저곳 무작정 여행을 다녔다. 돌아와보니 직원들이 회사를 지키고 있었다. 마냥 좌절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며 “회사가 힘들 때 직원들이 함께 해줬다. 직원들이 없었다면 이 회사는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직원들에 대한 고마움을 늘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 사업을 시작하면서 도움이 될 만한 신문 기사는 스크랩해둔다. 스크랩해 둔 1990년 4월 24일자 기사.

지난해부터 회사 내 산악회를 만들어 매월 산행을 하며 직원과의 관계도 돈독히 하고 있다. 가능하면 점심 식사도 직원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국내 기술로 대형 유조선 로딩암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꿈을 직원들과 함께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술 진보 속에 기업들은 수시로 생존 위기를 겪는다. 기술 흐름을 잘 읽는 통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회사 경쟁력이 곧 생존을 좌우하는 만큼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박 대표는 CEO특강, 역사 등을 통한 시대의 흐름을 읽는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특히 신문을 꼼꼼히 읽고 중요한 기사는 스크랩을 해둔다. 신문을 보면 경제뿐만 아니라 세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스크랩 해둔 신문 기사는 인생 노트가 됐다. 직원들에게도 시간이 없어도 신문을 많이 보라고 조언한다.

박 대표는 “100년 후 우리 회사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를 상상한다. 그리고 정년이 없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든 로딩암으로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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