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수필가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일에 정신을 박아 골몰하지 못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때가 많다.

예를 들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특히 이런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집사람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경우 나는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고 싶지만, 그 몸서리나는 사랑이야기 연속드라마를 마지못해 억지로 보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집사람이 전화기 있는 쪽으로 가서 통화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그 잠깐 사이의 사건 전개가 궁금한지 나에게 묻지만, 나는 알 턱이 없다. 그저 송아지 둠벙 들여다보듯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뿐, 생각은 딴 데에 가 있었으니 그 집 바람난 딸이 어느 유부남과 어디에서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 까닭이 없다.

나는 지난겨울 뜻하지 않은 담석증 수술을 받은 다음 의사 선생의 지시대로 두 달 이 지난 뒤에 오랜만의 목욕을 갔더니 온몸에 곰팡이가 피어 시골 뒷방에 앉혀놓은 메줏덩이처럼 볼모양 없이 되어 있었다. 남이 볼까 싶었는데, 다행히 목욕탕 안에는 서너 사람뿐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몸을 감추어 얼른 탕 속에 들어가 풍덩 앉아버렸다. 탕의 물이 얼마나 뜨거운지도 모르고 하마터면 펄펄 끓는 냄비 속의 주꾸미 신세가 될 뻔했지만, 한참을 꾹 참고 머리만 내놓고 앉아 있었더니 마침내 졸음이 오면서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물위로 붕 떠오르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도리 없이 탕 밖으로 나와 앉아 한참동안 몸에 밴 열을 식히고 있는데, 정말 뜻밖에도 중학시절 동네 목욕탕에서 만난, 같은 반 고향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가. 그때만 해도 아직 어린 나이여서 목욕탕 속의 알몸이 부끄러워 조심스럽게 돌아앉아 몸을 씻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머리를 돌려보니 같은 반 고향 친구인 최상준이었다. 목욕탕에서 교복 차림이 아닌 완전 알몸으로의 만남은 아무리 고향 친구라 할지라도 반갑기는 했지만, 쑥스러워서 계속 엎드려 발등의 때를 밀었다.

속담에 ‘까마귀도 내 땅 까마귀면 반갑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일이 있은 뒤 그와 나는 같은 문예반이기도 했지만, 목욕탕 안에서의 발가벗은 알몸 상봉의 인연으로 해서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

중학 6년을 졸업한 뒤 우리는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 나는 그 친구를 오랜 세월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뜻밖에도 그 친구에게서 지금 서울에 와 있다는 전화가 걸려와 그날 오후 음식점에서 만나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로 그 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그 친구는 현재 고향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지만, 문학에 대한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했는지 문예지 <現代文學>을 매월 받아볼 수 있도록 좀 도와 줄 수 없느냐는 말을 통해 나는 그의 생활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뒤 그의 소식은 두절되어 알 길이 없었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몇 년 전 하동의 ‘토지문학제’ 문학작품 현상공모에서 수필 부문의 심사를 맡아 평사리 시상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하동문학회의 젊은 회장을 만나 한두 마디의 인사말을 주고받은 것만으로 헤어졌다. 그런 뒤에도 평사리 ‘토지문학제’에 한두 번 더 가기는 했지만, 그 젊은 문학회 회장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몇 년째 계속 ≪하동문단≫이 우리 집으로 우송되어 왔다. 그 잡지 속에는 시, 소설, 수필, 평론 등이 실려 있었지만, 나는 어려서 고향을 떠나 아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 고향에도 훌륭한 문인들이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에 나름의 자부심을 가졌다.

지난 1월 어느 날엔가 2013년 ≪하동문단≫이 집으로 우송되어 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그 잡지의 ‘차례’를 보니 특집기획을 비롯하여 시, 수필, 소설 등 많은 작품들이 실려 있었다. 맨 앞의 특별기획에서 김남호 회장의 <하동문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글 중 ‘최영욱 시인과 하동문단’이란 글을 읽다가 나는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여기 그 한 대문을 인용한다.

그는 부친 (최상문 시인: 1932~1982)의 뒤를 이어 고향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에 대한 열정도 관심도 식어가는 지역의 문학을 회생시키기 위해 흩어진 문인들을 규합해서 하동문학회를 결성하고, 박경리 선생을 설득하여 2001년 ‘토지문학제’를 열었다.

그의 부친 최상문은 나의 중학시절 같은 반의 고향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득한 옛날 고향에서 한두 번 만나 희미하게나마 얼굴이 기억나는 그 친구의 부인 즉 최영욱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고달프고 마음 아팠던 지난날의 삶을 그의 자선(自選) 시 9편 중 <밥>에서 읽을 수 있었다. 여기 그 한 대문을 옮긴다.

한 줌 보리쌀로 저녁을 안치던 어머님도 눈물밥을 지으셨다.
무쇠솥에 떨군 어머님의 눈물을 닮아 늘 무른 밥이었다.
날아야 하는 길이 멀어 먹어야만 하는 것이
키우기 위해 먹여야 하는 걸 꼭 닮아 있었다.

이 시를 읽고 나서 나는 가슴이 저려 친구의 아들 최영욱 시인에게 짤막한 사연의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중학시절 교복, 교모 차림인 최상문과 함께 친구 셋이 사진관에서 나란히 앉고 서고하여 찍은 사진도 한 장 보냈다. 편지를 보내고 나서 괜히 친구 아들의 마음을 새삼 아프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어 후회를 했지만, 최영욱 시인에게서 이런 회답이 와서 안도했다.

“날씨가 풀리면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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