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이를테면 우정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믿음이라든지, 의리라든지, 양심이라든지, 그리고 사람의 도리라든지, 뭐 이런 것들 말입니다. 이것들은 험한 세상을 지켜주는 청량제 같은 것들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이러한 것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느낌입니다.

어제는 세월호 사고에 대한 검찰의 발표가 있었고, 어느 단체에서는 세월호에 대한 화형식이 있었고, 어느 단체에서는 김구를 죽인 안두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칭송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래도 되는 것일까?” 남을 배려하지 않는 잔인한 모습들. 내 주장만 내세우는 독한 모습들. 과연 우리가 이래도 되는 것인지 한번쯤 되돌아봐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가 한세상 살다 가는 것이 도대체 우리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 누구의 부모로 살면서 오직 핏줄의 의무를 충실히 하다가 가는 것이 사람 된 도리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다른 동물들도 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동물과는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점점 사람답게 살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동물처럼 변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나만 찾고, 내 가족만 찾고, 내 핏줄만 찾고, 내 주장만 강조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열심히 노력을 했든, 영리하게 행동을 했든, 성공한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흔히 말하는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용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고, 자기가 자란 개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그가 지렁이와 다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그를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우러러 볼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프고 시리고 배고픈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은 민생에는 관심이 없고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들의 행태가 사람의 행태라기보다는 동물의 행태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제는 세월호 선원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습니다. 재판을 받던 어느 선원은 자기 한 몸 챙기느라 학생들을 보살필 겨를조차 없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임무는 사고 시에 승객들을 구조하는 일인데 자기 한 몸 챙기기에도 바빠서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선장은 혼자 살기 위해 사복으로 갈아입고 일반인이라 속이면서 탈출을 시도했고, 대부분의 선원들은 혼자 살기 위해 도망가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월호의 사무장으로 근무했던 양대웅씨입니다.

그는 모두가 도망을 갈 때,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배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아이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며 자신의 아이들을 부탁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이러한 사실을 대서특필을 했지요. 의로운 사람이라고. 모두가 동물 같은 행동을 취할 때, 그래도 사람다운 사람이 있었다고. 우리는 그의 행동에 그래도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 양대웅 사무장이 바로 여수 사람이고 저의 고등학교 후배입니다.

얼마전 우연히 양대웅 사무장의 형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인의 가족들이 생활고에 몹시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도 각계에서 답지한 부조금을 일체 받지 않아서 또다시 칭송을 받았던 가족들인데 지금은 너무나 생활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을 의사자로 지정해 준다고 했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고, 고인처럼 선원의 신분으로 사망한 사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조치가 없나 봅니다.

아버지는 칭찬 받을 일로 목숨을 잃었는데 남은 가족들이 힘들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수공고 총동문회에서는 김광중 회장을 비롯한 동문들이 모여서 어떻게 해서든지 고인의 가족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고인의 남은 아이들, 고등학교도 보내야 하고 대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아버지 대신에 남아있는 우리가 그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수많은 아이들을 모두 건질 수는 없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아이들부터 한 몇 한 명 건지다보면 언젠가 세월호에 탄 아이들 수만큼은 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많은 선원들이 1층에서부터 선상까지 150미터의 통로를 뚫고 올라오는 도중에 각 방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학생들의 울부짖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명의 학생도 구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온 국민은 함께 분노했고 함께 울었습니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해서 희생된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해 했습니다. 그리고 입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월호 선장의 반인륜적인 모습을 비난하고, 선원들의 무책임을 질타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자신은 그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임을 지지 않는 어른들이 꼭 세월호 안에만 있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세월호 안에 있던 그 어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이고, 남은 죽든지 말든지 나만 살아야 하고,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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