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희생하지 않고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미쳐야 한다.”

▲ 장창익 작가.

“작가의 개성이 있어야 한다. 개성이 곧 그 작가의 영혼이다. 그러려면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해서 소위 ‘자기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미쳐야 한다.”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 하지만 기술은 좋은데 영혼이 없다. 누가 그러더라. 작가 사인만 바꿔버리면 누구 그림인지 모르겠다고…”

장창익(57) 작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광주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여수로 왔다. 여수동초등학교(25회)와 동중학교, 여수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예술가의 길은 험난하고 고난의 연속이었다.

여수시 율촌면 상봉리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신문사가 주최한 그림대회에서 입선한 이후 각종 미술대회에서 상을 휩쓸다시피 했지만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부친의 예술적 디엔에이(DNA)를 타고난 덕(?)에 예술가의 길을 꿈꿨다. 하지만 장 작가에게 고난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21살 군대에서 지뢰를 밝아 한쪽 눈과 한쪽 다리 무릎 아래를 잃었다. 갑자기 닥친 사고에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을 겪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맞서며 작가로써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그 길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뼈아픈 고통과 역경(逆境)의 연속이었다. 온전한 몸으로도 가기 힘든 작가의 길을 장 작가는 그 누구보다도 더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작품에만 매진해왔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또 누가 봐 주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 작가는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가는 그 길만이 자신을 살려낼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때 그림의 방향을 잡지 못해 방황하기도 했다. 정신적인 방황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1996년 초 여수시 거문도로 들어가 4년가량 배를 타면서 바람과 파도와 싸웠다. 섬 생활을 끝내고 2001년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면서 안정이 됐다. 하지만 10년 간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내 것’을 구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 33x23.3cm_목판설채2_2012

남농 허건 선생에게서 사군자를 배우다
처음 동양화를 권유받았을 때 만화처럼 보여 언뜻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게 쉽지 않았다. 갈등했다. 동양화를 배워도 서양화는 계속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양화를 배우기로 했다.

1980년 남농 허건(許楗)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사군자를 배우고, 추계예술대학(동양화과·1986년 졸업)에서 동양화를 공부했다.

남농 허건 선생은 한국화 화단의 거목이다. 조부는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 선생으로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다.

장 작가는 “남농 선생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추운 방에서 쭈그리고 그림을 그리다 동상에 걸려 발 한쪽을 절단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동양화를 우습게 봤다. 남농 선생이 난을 쳐서 던져 주며 똑 같이 치라고 하더라. 그걸로 끝이었다.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10년 이상 서양화를 독학해온 구력이 있으니까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잘 안 되더라.”

오기가 생겼다. 하루에 14시간 이상 쭈그리고 앉아 한 달에 500~600장씩 썼다. 3개월 만에 사군자를 뗄 수 있었다.

“동양화는 서양화와 완전히 다르다. 서양화는 캔버스 위에 발라서 입히는 것이라면 동양화는 염색의 개념이다. 동양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붓이 두 번 가면 곧바로 표시가 나기 때문이다. 일필휘지다. 그래서 동양화는 내공이 필요하다.”

“서양은 글을 쓰는 필기구와 그림을 그리는 붓이 다르다. 동양은 그림 그리는 붓과 글 쓰는 붓이 같다. 크기만 다를 뿐이다. 그림과 서예가 둘이 아니라는 서화일치(書畵一致) 사상이다.”

장 작가는 자신과 대중을 만족시켜야 하는 이중성의 접점을 찾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만족시키면 대중에게 너무 난해하다. 대중을 쫒아가다 보면 본인이 만족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경계를 잘 걸어간 사람이 추사 김정희 선생이다. 당시에는 추사체가 없었다. 추사체는 왕희지나 구양순 등의 서예가들의 전통적인 필법과 추사만의 필법이 어우러져 탄생한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래서 천재다. 이 길을 부단히 찾아내려는 몸부림이 예술가의 숙명이다.”

“정신적·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여유가 있으면 잘 안 되는 게 예술이다. 가슴에 무엇인가 증오와 아픔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예술은 자본하고 결탁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일정 부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를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는 작가 개인의 선택이다. 이를 부정한다면 세상을 등지고 혼자 그림 그리고 모조리 태워버려야 한다. 자기만족으로 끝내야 한다.”

▲ 128x159cm_화선지 수묵채색_2013

‘목판화’ 간결함과 굵은 선이 뿜어내는 힘찬 표현력
목판 작업은 그의 작품세계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장르다.

그의 목판화는 간결함과 굵은 선이 뿜어내는 힘찬 표현력을 특징으로 들 수 있는데, 이는 1980년대 민중미술에 가장 적합한 표현방식이었고, 또 칼과 나무만 있으면 언제든지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간편함까지 더해져 많은 작가들이 목판화 작업에 동참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목판화는 제대로 꽃을 피우기도 전에 민중미술의 퇴조와 미술시장의 상업 논리에 의해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장 작가도 한동안 방향을 잃고 방황해야 했다.

장창익 작가의 대표적인 장르는 채색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으로 생활이 안정되고 작가로써 어느 정도 경륜(經綸)이 쌓여가던 2003년경부터 채색작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트허브 황선형(모리스갤러리 대표) 대표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채색 작업은 주로 꽃과 나무를 다루고 있지만 통상적으로 예쁘고 아름답게만 그려지는 꽃과 나무들과는 사뭇 다르다. 전지(全紙)에 굵은 선으로 윤곽선을 만들고 그 윤곽선 안에 단색조로 층층이 쌓아 올려 채색한 꽃과 나무들은 무한한 힘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무한한 힘의 느낌은 꽃과 나무 위로 흘러내리는 꽃비에 의해 중화(中和)되고, 꽃비는 작가가 그동안 육체적·정신적 고통으로 흘렸을 눈물로 바뀌어 처연(凄然)하게 다시 흘러내린다.”

“채색 작품 중에 눈에 띄는 또 하나의 작품군은 문자추상이다. 한자(漢字)의 나무 木, 큰 大, 눈 目, 꽃 花, 뫼 山과 비슷한 글자 모양의 붓놀림에 의해 그려진 문자추상의 독특함은 장 작가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서예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장 작가에게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척박한 땅에서 자란 야생화만을 고집해 100호 넘는 대작들이 많다.

“사람이 절박하면 꽃을 봐도 아름답게 안 보인다. 하지만 야생초는 누가 돌보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살아간다. 생명력이 강하고 색깔이 소박하다.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 꽃들이다. 민중들처럼 누가 봐주지 않아도, 땅이 척박해도 질긴 생명력을 유지한다.”

야생화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여수의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도 꽤 있다. 장 작가는 10년 동안 회화작품 3000여점과 판화 드로잉 5000여점을 그렸다. 미발표 작품만 3000여점에 이른다.

200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개인전 12회, 2人展 4회, 다수의 그룹전을 가진 바 있으며, ‘2013년을 빛낼 올해의 작가 33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미술협의회 여수지부 고문, 서울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 전속작가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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