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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잘 가세요정호경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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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24  15: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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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숲이 우거진 뒷산을 닮아 별로 말이 없습니다. 가끔씩 잡귀를 쫓는 5층의 개 짖는 소리만이 내 신경을 건드리고 지나갈 뿐, 아파트 경비원도 나도 별로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모두들 입을 닫은, 원시의 그날 같은 오늘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군요. 그래서인지 온 세상이 적막하기 절간 같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이렇게 묵묵하고 조용하면, 소주에 삼겹살은 아니라도 나는 태평성대 만수무강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하늘이 드니 온 세상이 맑고 푸릅니다. 우리를 아프고 슬프게 만들었던 요즘의 일들은 이제 모두 물러갔습니다. 짐승과 사람이 사는 곳은 각각 다릅니다. 여기는 사람이 사는 곳이니 제발 그 누렇고 날이 선 이빨로 하이에나처럼 웃지 마세요. 그런 웃음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 압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속지 않을 것입니다. 심각한 얼굴로 말은 그래도 우리는 하루만 지나면 또 부처님처럼 까맣게 잊고 말 것입니다.

하늘로 땅으로 바다로 길은 많이 뚫려 있는데, 내가 갈 길은 하나도 안 보이네요.어느 길은 손때 묻은 화투 냄새, 어느 길은 송장 냄새 또 다른 어느 길은 썩은 돈 냄새 때문에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디딜 수가 없네요.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고 멀미약을 먹었더니 더 흔들리고 어지럽네요. 과식을 했을까요. 아니면 아직도 '세월호'의 혼돈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이승인지 저승인지 도대체 분간을 못 하겠네요. 전지전능하신 천지신명이시여, 제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십시오. 아침저녁으로 지르는 나의 외마디소리를 하늘과 땅의 거리가 너무 멀어 들리지 않으시는지요. 나는 밥 먹는 일 말고도 아직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지난 4월 어느 날엔가 봄꽃들을 따라 몇 년을 듣지 못한 뻐꾸기 울음소리가 그리워서 이곳 화양면 한적한 농촌으로 가서 오후 한나절을 산비탈에 앉아 있다가 허탕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방금 어느 방송국에서 아직도 진도에 남아 있는 ‘세월호’ 유가족 소식을 보도하는 장면에서 뜻밖에 진도의 뻐꾸기 울음소리가 그것도 선명하게 들려 왔습니다. 농약 때문에 뻐꾸기 종자조차 말끔히 사라진 농촌인 줄 알았는데, 정말 반가웠습니다. 내 어린 시절의 봄은 뻐꾸기, 뜸부기 울음소리에서 시작했었는데요.

오늘은 말복이자 입추입니다. 여름 더위가 가고 가을이 들어서는 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위를 이기기 위해 여름철에는 닭이나 개로 보신하는 풍습이 오래도록 전해오고 있는데, 그런 풍습으로 봐 오늘은 견공들이 마음을 놓는 날이기도 합니다. 집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기 위해 평생을 문간에서 목이 쉬도록 짖어대다가 결국에는 주인의 여름철 보신용으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개보다 못한 사람들이 사철주야로 날뛰고 있으니 이 난장판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지만, 누가 무슨 짓을 하건 개의치 않고, 가을하늘은 높고 푸르기만 하네요.

옛날 어렸을 적 비 오는 날엔 초가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콩을 볶아 먹었지요. 오늘 오전에는 구름이 걷히면서 볕이 날 것 같더니 오후에는 또 비가 내립니다. 겨울철 눈 오는 날이 크리스마스 날이듯이 여름철 비 오는 날은 콩 볶아 먹는 날입니다. 지금 나는 창 밖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옛날 어린 시절 콩 볶아 먹던 그 날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입맛은 떨어지면서 그리운 것은 왜 이렇게 많아지는지요. 오늘 같은 날 거실 마루에 앉아 창밖의 빗소리 들으며 콩을 볶아 먹고 싶어도 이가 시원찮으니 파리채 들고 앉아서 탁 탁 파리나 잡아야겠네요. 하지만, 앵앵 하고 제트기 소리를 내는, 젊은 녀석은 너무 빨라 못 잡겠고, 몸이 무거운, 늙은 녀석은 날아가는 속도가 느려 쉽게 잡을 수는 있어도 불쌍해서 팔을 못 놀리겠네요. 비 오는 날은 콩 볶아 먹는 날이지 이가 시원찮다고 괜한 심심풀이로 파리 잡는 날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 같은 소중한, 목숨 아닌가요.

우리 집에서 내려다보는 앞바다는 경관이 아름답다는 것이 첫째이지만, 거문도를 비롯한 인근 섬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삶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럭처럼 까맣게 탄 어부들의 얼굴이 보이고, 갈치보다 더 마른 할머니들의 꼬부라진 허리가 자꾸 눈에 걸립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만난 이들의 표정은 삶이 즐겁기만 하고, 사돈댁 안부가 궁금하기만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뱃길이 너무 시끄럽고 어지럽네요. 서로 쓰다듬어주며 즐겁고 사이좋게 살았으면 좋겠네요. 사람의 위장은 어른 손바닥만한데, 먹으면 얼마나 먹겠다고 그토록 눈알을 부라리는지요. 내일은 그 누군가가 무지하게 땅과 돈 탐을 내다가 빈손으로 이승을 떠나는 날입니다. 잘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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