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를 읽으며 충무공을 찾아 나서다 4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방답의 병선군관과 아전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로 곤장을 때렸다. 우후와 가수들이 또한 감독을 소홀히 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몹시 이상한 일이다. 제 한 몸 살찌울 것만 일삼고 딴 일은 돌보지 않았으니 앞날의 일 또한 짐작한 만하다. 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라는 석수는 선생원에 쓸 돌을 뜨는 데로 가서는 근처 동네의 개를 잡아먹는 등 민폐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려 벌했다.”

임진년(1592년) 1월 16일 일기다. 자애로운 분인데도 서릿발이 서려 있다. 나라 구한 장군의 힘이 새삼 느껴진다.

▲ 이순신 장군 영정 전남 여수시 충민사길 52-21(덕충동 1829)에 위치한 충민사의 유물관 안에 전시된 이순신 장군의 사진이다. ⓒ 송서연

‘세월호’에 우리는 아직도 아프다. 세월호의 선체가 뭍으로 올라왔다지만, 가족의 품안에 안길 때까지 아직 그들은 올라오지 않았다. 아니, 그들이 왜 그렇게 수장되었는지, 그토록 오랫동안 바다 밑에 있어야 했는지, 도대체 왜 그랬는지를 다 알기 전에는, 우리는 여전히 아플 것이다.

음악시간에, 세월호 희생자 고 이보미 학생이 즐겨 들었다는 ‘거위의 꿈’을 들었다. 졸업식에서 부를 이 노래를 연습하고 친구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면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학교를 다녔을 영상 속에 언니는, 내 옆의 친구들과 그리고 나와 똑같았다. 울컥했다.

…그러니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는 사람에게 장군께서 하시는 말씀을 무릎 꿇고 듣자. 우선, “방답의 병선군관과 아전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로 곤장을 때”리면 된다. 나아가, “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라는 석수는 선생원에 쓸 돌을 뜨는 데로 가서는 근처 동네의 개를 잡아먹는 등 민폐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려 벌”하면 된다.

우리 시대의 ‘군관과 아전’이 누구이며 ‘토병 박몽세’가 누군가. 그리고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는 사람’은 또 누구인가. 용서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화합은 정의 위에 세워져야 한다. 장군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자. 다시, 무릎 꿇고, 장군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자. 그래야 ‘새 정부’다.

(여수충무고 학생동아리 ‘이순신연구소’ 박인화, 홍지원, 송서연, 김윤식, 정승화, 서지희. 대표집필 송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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