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빈 (전 검찰총장/고려대 교수)







 

가끔 부르는 노래가 있다. “동지 섣달 긴긴 밤이 짧기만 한 것은 근심으로 지새우는 어머님 마음, 흰 머리 잔주름이 늘어만 가시는데 한없이 이어지는 모정의 세월, 아 ~~~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일 듯, 어머니 가슴에는 물결만 높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많이도 불렀던 ‘모정의 세월’이다. 우리 세대가 태어나고 자랄 때, 우리의 부모들은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한 집에 보통 대여섯 명의 자식을 낳았다.



이렇게 자식이 많다 보니 어머니는 ‘가지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일 듯’ 자식 걱정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을 우리 부모들은 철석같이 믿었던 것 같다.



그 믿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때의 자식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난을 가난이라 여기지 않고, 고생을 고생이라 여기지 않으면서 씩씩하게 자랐다. 이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의 장년층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중 상당수는 스스로 일어서 보겠다는 일념으로 새벽에 신문배달을 해서, 입주 과외를 해서, 심지어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해서 학비를 벌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러한 학생들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경제적 여건이 많이 나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 부모들 대부분이 아이들에게 굳이 고생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 부모들이 너무 과도하게 아이들 곁에 밀착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아이가 혼자 일어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너무 일찍 손을 잡아주는 것은 아닌지, 아이가 자신의 문제를 혼자 판단하기도 전에 우리 부모가 너무 일찍 결론을 내려주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요즘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 학생들 대부분이



상당히 우수한 학생들이다. 그러나 그 학생들을 보면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아쉬움은 성적은 우수한데 ‘홀로서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학생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부모들에게 간곡한 당부 하나를 하고 싶다. 일부러라도 자식들의 인생에서 한 발 물러나 달라고, 그리고 아이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을 넓혀주라고 말이다.



아이가 정신적 방황을 하면서 성장통을 앓더라도, 그리고 부모가 보기에 분명 아닌 것을 하려고 아이가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에도 가급적 그것을 간섭하기 보다는 아이를 믿고 기다려 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툴툴 털고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이 그렇게 혼자 고민하면서 혼자 힘으로 일어설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는 부모가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너 스스로 알아서 찾아보라’며 세상의 어려움을 아이 스스로 깨닫게 하는 부모이다.



아이의 철없는 얘기를 그저 조용히 들어줄 수 있는 귀와 힘들어하는 아이의 어깨를 말없이 토닥여줄 수 있는 손과 어설프기 짝이 없는 아이의 행동을 보고도 그냥 웃음 지으며 바라봐 줄 수 있는 눈이 있으면 그것으로 훌륭한 부모가 아닐까 싶다.



아이는 이렇게 세상과 부딪쳐 가면서 가끔은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아픔을 겪으면서 제 스스로를 갈고 다듬어 가는 존재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그것을 이겨내고 오늘날 우리가 되었듯이 아이들도 그러한 좌절과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의 인격체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때, 아이의 좌절에 안절부절 못하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의 좌절을 보면서도 한 발 물러서서 조용히 지켜보며 격려하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몫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저지르는 작은 실수를 마치 아이의 실패인 것같이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



좌절하고, 일어나고, 좌절하고, 일어나는 삶 속에서 아이들은 성장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좌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진정 필요한 것은 지금 아이가 외우고 있는 수학공식이나 영어 단어가 아니다.



그것 때문에 키우지 못했던 부분, 즉 자기의 마음을 다루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능력의 부족이 결국에는 아이들을 더 심하게 괴롭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내 자식만큼은 …’ 하는 마음 간절하겠지만 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가는 것을 묵묵히 참고 지켜보는 부모가 되어 주기를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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