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금만=1970 여수출생, 새종대학교 미술학과 대학원 졸업 1998-2021 제13회 개인전 (삼정아트스페이스, 인사갤러리) 이즈갤러리, 평촌아트홀, 인사이트센터. 여수미술관 옥적갤러리 등 2016 광주아트페어16(국립아시아 문화전당), (호텔 아트페어), (메리어트 호텔). 2016 카우슝 아트페어 (대만), 2018 마니프 서울국제 아트페어. 2018 (예술의 전당). 2021 여순항쟁 특별전 근현대사미술관 담다

뉴스탑전남은 여순사건 관련 그림과 시 등 문화, 예술 작품들을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한 '여순갤러리'를 운영합니다.

 

■수탈=여순항쟁이 일어나기 전, 여수나 순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미곡 수집령으로 쌀 가격은 폭락하고 정부 관리들은 착취한 쌀을 창고에 넣어두고 비싸질 때까지 풀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들의 그 피 같은 쌀로 자신들의 배만 불릴 기회를 역보다 실제로 두 배 이상 폭등할 때 팔아서 부를 축적하였다. 이런 부류를 당시를 모리간상배라 하였다. 관리들은 경찰이 비호하는 가운데 농민에게서 쌀을 무자비하게 췩취해 갔다. 그리고 여수 농민들은 자신이 농사지은 살을 오히려 두 배 값을 두고 사먹어여햐 할 상황이었다. 여수 토박이인 86세 한 할머니는 자산고원 밑이 자신의 집이었다고 한다. 여순항쟁 당시 집 아래 종화동 식량영단 창고가 있었는데 활짝열린 식량창고에 쌀이 썩어나고 쥐가 들끊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말해 주었다. 이들에게 굶주린 민중이란 무엇이었을까? 작품속에서 한 줌의 쌀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민주의 저항. 우리 민족에게는 쌀이란 목숨이었다. 14연대의 봉기로 촉발된 여순항쟁은 여수 민중의 분노였다.
■수탈=여순항쟁이 일어나기 전, 여수나 순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미곡 수집령으로 쌀 가격은 폭락하고 정부 관리들은 착취한 쌀을 창고에 넣어두고 비싸질 때까지 풀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들의 그 피 같은 쌀로 자신들의 배만 불릴 기회를 역보다 실제로 두 배 이상 폭등할 때 팔아서 부를 축적하였다. 이런 부류를 당시를 모리간상배라 하였다. 관리들은 경찰이 비호하는 가운데 농민에게서 쌀을 무자비하게 췩취해 갔다. 그리고 여수 농민들은 자신이 농사지은 살을 오히려 두 배 값을 두고 사먹어여햐 할 상황이었다. 여수 토박이인 86세 한 할머니는 자산고원 밑이 자신의 집이었다고 한다. 여순항쟁 당시 집 아래 종화동 식량영단 창고가 있었는데 활짝열린 식량창고에 쌀이 썩어나고 쥐가 들끊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말해 주었다. 이들에게 굶주린 민중이란 무엇이었을까? 작품속에서 한 줌의 쌀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민주의 저항. 우리 민족에게는 쌀이란 목숨이었다. 14연대의 봉기로 촉발된 여순항쟁은 여수 민중의 분노였다.
■14연대-시작=그 당시 국군 14연대 군인들에게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를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14연대 군인들은 “우리의 동포를 학살할 수었다”고 해서 명령을 거부하고 부대원들은 설득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하는 장면이다. 이들은 혼란 속에서도 각자 임무를 정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밤늦게 14연대를 장악한 봉기군은 여수역을 통해 지리산으로 들어가려 했다. 14연대는 여수를 장악하하고 통치하려는 목적은 없었다. 산으로 들어가 유격투쟁에 돌입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이는 당시 봉산지서장 서리인 신열길 씨의 저서를 비롯한 일부 서적에서 ‘좌익 청년들이 부대 밖에서 미리 기다리다 합류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왜곡된 내용이라고 증언한다.
■14연대-시작=그 당시 국군 14연대 군인들에게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를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14연대 군인들은 “우리의 동포를 학살할 수었다”고 해서 명령을 거부하고 부대원들은 설득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하는 장면이다. 이들은 혼란 속에서도 각자 임무를 정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밤늦게 14연대를 장악한 봉기군은 여수역을 통해 지리산으로 들어가려 했다. 14연대는 여수를 장악하하고 통치하려는 목적은 없었다. 산으로 들어가 유격투쟁에 돌입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이는 당시 봉산지서장 서리인 신열길 씨의 저서를 비롯한 일부 서적에서 ‘좌익 청년들이 부대 밖에서 미리 기다리다 합류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왜곡된 내용이라고 증언한다.
■여수군 인민대회=역사적인 관점에서 72년 전 여수의 심장인 진남관 앞에서 있었던 여수 인민대회는 여순항쟁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여순 작업을 해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작풍이다. 봉기군이 시발점이 되었지만 1000여명의 여수시민들이 진압군과 맞서 5차례나 전투를 치른 역사는 동학혁명과 3.1운동,여순항쟁 그리고 4.19혁명, 5.18광주민주화 운동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민중저항 정신의 표본아라고 할 수 있다. 1948년 10월 19일 군인들의 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로부터 억눌리고 착취 당하던 여수시민들은 다음 날인 10월 20일 오후 2시 여수중앙동 진남관 앞 거리에서 인민대회를 거행하였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와해된 여수 인민위원회가 다시 결성되어 7일간 여수의 행정을 이끌었다. 이용기 여수인민위원장이 6개항을 발표했다. 내용은 친일파 척결, 은행예금을 동결하고 재산을 압수하며, 적산가옥과 부정한 관권은 연고자에게 돌려주고, 매판자본가의 사업장은 종업원에 돌려주며 쌀 배급을 하며 무상으로 금융대부를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여수군 인민대회=역사적인 관점에서 72년 전 여수의 심장인 진남관 앞에서 있었던 여수 인민대회는 여순항쟁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여순 작업을 해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작풍이다. 봉기군이 시발점이 되었지만 1000여명의 여수시민들이 진압군과 맞서 5차례나 전투를 치른 역사는 동학혁명과 3.1운동,여순항쟁 그리고 4.19혁명, 5.18광주민주화 운동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민중저항 정신의 표본아라고 할 수 있다. 1948년 10월 19일 군인들의 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로부터 억눌리고 착취 당하던 여수시민들은 다음 날인 10월 20일 오후 2시 여수중앙동 진남관 앞 거리에서 인민대회를 거행하였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와해된 여수 인민위원회가 다시 결성되어 7일간 여수의 행정을 이끌었다. 이용기 여수인민위원장이 6개항을 발표했다. 내용은 친일파 척결, 은행예금을 동결하고 재산을 압수하며, 적산가옥과 부정한 관권은 연고자에게 돌려주고, 매판자본가의 사업장은 종업원에 돌려주며 쌀 배급을 하며 무상으로 금융대부를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 장대다리 전투=이 작품은 14연대거 순천 입성 후 벌인 첫 전투로 경찰의 시선에서 작업하였다. 14연대가 최초 순천에 입성하자 이를 방어해야 하는 경찰들은 14연대에 비해 구형 총으로 무장을 했기에 사거리도 짧았으며 탄환도 각자 12발만 가지고 싸웠다. 경찰에게는 힘든 전투였다. 죽도봉에서 내리 꽃는 총탄도 경차이 막기는 힘들었다. 또한 광주 4연대가 증원 왔는데, 4연대는 14연대 부대원들이 훈련받은 곳이라서 첫 진압 온 부대원들은 대부분 훈련 동기들아었다. 이들은 진압은 커녕 동기들을 보자 합류해 버린다, 밀리던 경찰들은 4연대의 차량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들이 자신들은 공격하고 14연대와 합​​​​​세해 버려서 경찰들과 청년단원들은 수많은 사살자를 내고 각자 도망가고 말았다. 장대다리와 죽도봉은 지금도 그 장소에 있었으며 그 당시 죽도봉은 나무가 거의없고 경작하는 밭이었다
■ 장대다리 전투=이 작품은 14연대거 순천 입성 후 벌인 첫 전투로 경찰의 시선에서 작업하였다. 14연대가 최초 순천에 입성하자 이를 방어해야 하는 경찰들은 14연대에 비해 구형 총으로 무장을 했기에 사거리도 짧았으며 탄환도 각자 12발만 가지고 싸웠다. 경찰에게는 힘든 전투였다. 죽도봉에서 내리 꽃는 총탄도 경차이 막기는 힘들었다. 또한 광주 4연대가 증원 왔는데, 4연대는 14연대 부대원들이 훈련받은 곳이라서 첫 진압 온 부대원들은 대부분 훈련 동기들아었다. 이들은 진압은 커녕 동기들을 보자 합류해 버린다, 밀리던 경찰들은 4연대의 차량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들이 자신들은 공격하고 14연대와 합​​​​​세해 버려서 경찰들과 청년단원들은 수많은 사살자를 내고 각자 도망가고 말았다. 장대다리와 죽도봉은 지금도 그 장소에 있었으며 그 당시 죽도봉은 나무가 거의없고 경작하는 밭이었다

 

■ 덕충동에서=진압 작전 막바지 여수 중학생 및 수산학교 청년 학생들이 현 중앙여고 귀편으로 올라오는 진압군과 맞서는 장면인데 어린 학생이 혈기에 불끈 일어서지만 수산학교 형님이 소년을 잡아끄는 장면이다. 1948년 10월 26일 14연대 군인들은 이미 빠져나가고 여수에 남은 청년학생들은 진압군과 맞서 싸우다 현암도서관 옆 석천사까지 밀리다가 마지막에 덕충동으로 도주했다. 
■ 덕충동에서=진압 작전 막바지 여수 중학생 및 수산학교 청년 학생들이 현 중앙여고 귀편으로 올라오는 진압군과 맞서는 장면인데 어린 학생이 혈기에 불끈 일어서지만 수산학교 형님이 소년을 잡아끄는 장면이다. 1948년 10월 26일 14연대 군인들은 이미 빠져나가고 여수에 남은 청년학생들은 진압군과 맞서 싸우다 현암도서관 옆 석천사까지 밀리다가 마지막에 덕충동으로 도주했다. 

 

■막내 태식이=부역 혐의자가 되어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중 제4차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120여 명이 1949년 1월 13일 만성리에서 총살되고 불태워졌다. 5명씩 총살한 후에 다시 5명씩 장작 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에 120여 명이 매장되었다. 처형은 군인들이 주도하였고, 장작에 기름을 부어 시신들을 불에 태운 후 태워진 시신 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림에서 봉기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17살의 학생이었던 태식이도 만성리로 끌려갔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형은 목숨을 걸고 막내동생 시신이라도 찾으러 동트기 전 이른 새벽에 만성리 학살터에 갔다. 형은 막내가 죽었다며 시신이라도 지게에 지고 오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보니 서로 뒤엉켜서 타고 있는 시신들만 있었다. 형은 넋을 잃고 앉아 있다. 막내 태식이는 신발 한 짝만 남기고 재가 되었다. 저기 저렇게 앉아 있는 형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가족의 아픔을 정부는 특별법 제정으로 위로해드리길 간절히 바란다. 학살 이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 붙였다.
■막내 태식이=부역 혐의자가 되어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중 제4차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120여 명이 1949년 1월 13일 만성리에서 총살되고 불태워졌다. 5명씩 총살한 후에 다시 5명씩 장작 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에 120여 명이 매장되었다. 처형은 군인들이 주도하였고, 장작에 기름을 부어 시신들을 불에 태운 후 태워진 시신 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림에서 봉기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17살의 학생이었던 태식이도 만성리로 끌려갔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형은 목숨을 걸고 막내동생 시신이라도 찾으러 동트기 전 이른 새벽에 만성리 학살터에 갔다. 형은 막내가 죽었다며 시신이라도 지게에 지고 오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보니 서로 뒤엉켜서 타고 있는 시신들만 있었다. 형은 넋을 잃고 앉아 있다. 막내 태식이는 신발 한 짝만 남기고 재가 되었다. 저기 저렇게 앉아 있는 형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가족의 아픔을 정부는 특별법 제정으로 위로해드리길 간절히 바란다. 학살 이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 붙였다.

 

■여수의 해원(解寃)=만성리 굴을 지나 여순 위령비 자리가 있다. 만성리 학살지는 1948년 11월부터 골짜기에 민간인 부역자 수백 명을 몰아넣고 학살 후 불로 태운 장소이며, 그 자리 바로 위쪽은 1949년 1월 종산초등학교에 수용된 120여 명이 끌려와 처형된 곳으로 시신을 분간 못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잘 있으라고 지어준 형제묘 자리이다. 그림은 1949년 1월을 표현하고 있다. 산 위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는 여수 사람들의 억울한 영혼들이다. 사람들은 만성리 굴을 지나가려면 움푹 들어간 자리에 돌을 던졌다. 사람들은 “저기는 귀신들이 사는 자리라 수영하러 가기 전에 돌을 던지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는다”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시신에 손을 댄다면 자신도 부역자로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침묵으로 돌을 던졌던  여수 사람들의 해원(解寃)일 것이다. 어린 시절 저곳은 우리들이 던진 돌로 무덤이 되어 있었다.
■여수의 해원(解寃)=만성리 굴을 지나 여순 위령비 자리가 있다. 만성리 학살지는 1948년 11월부터 골짜기에 민간인 부역자 수백 명을 몰아넣고 학살 후 불로 태운 장소이며, 그 자리 바로 위쪽은 1949년 1월 종산초등학교에 수용된 120여 명이 끌려와 처형된 곳으로 시신을 분간 못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잘 있으라고 지어준 형제묘 자리이다. 그림은 1949년 1월을 표현하고 있다. 산 위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는 여수 사람들의 억울한 영혼들이다. 사람들은 만성리 굴을 지나가려면 움푹 들어간 자리에 돌을 던졌다. 사람들은 “저기는 귀신들이 사는 자리라 수영하러 가기 전에 돌을 던지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는다”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시신에 손을 댄다면 자신도 부역자로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침묵으로 돌을 던졌던  여수 사람들의 해원(解寃)일 것이다. 어린 시절 저곳은 우리들이 던진 돌로 무덤이 되어 있었다.

 

 애기섬Ⅱ (국민보도연맹)여수의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여순항쟁 관련자들인데 이들은 1950년 7월 중순 전황에 따라 CIC(국군 특무대, 이후 보안사-기무사), 여수경찰서, 각 지서에 구금되었다가 당시 여수 주둔 중인 병력은 제15연대가 철수하면서 7월 16일, 23일에 걸쳐 12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을 총살 후 바다에 수장했다.학살의 주체는 경찰, CIC 특무대, 15연대 헌병대였다. 1950년 6월 27일경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 및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무전지시에 따른 것이다.애기섬까지 가서 수장시킨 이유는 해류가 일본으로 흘러가서 시신이 여수 쪽으로 돌아오지 않아서였다. 이런 부분까지 생각하며 수장을 실행했던 실무자들이, 아니 그들에게 지시한 이승만 정부가 치가 떨리게 무섭다는 것이다. 국가 권력이 이렇게 치밀하게 계산해서 자국민을 수장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전투를 통해서 국민을 지키지 못하고 자국민을 빨갱이로 몰아서 희생시킨 것이다.학살에 가담한 CIC 특무대 요원의 증언은 눈을 가린 후 밧줄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총살 후 바다에 수장하였다고 했다.그림 속의 한복을 입은 한 남자는 실제로 거기 있었을 거라 추정하는 분을 그렸다. 눈을 가리기 전에 자신의 가족이 사는 마을 쪽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그 순간 그리운 아내와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식을 그리워하며 마음속으로 잘 살아주기를 기원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중에 억울한 한을 풀어달라고 하지 않았을까?수장에 사용된 흥안호는 처음 일제가 군선으로 사용하다가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대한민국 군선으로 사용했다.6.25 이후에 이 한이 서린 배는 용도를 바꿔서 남해안 연안여객선으로 사용하였다.앞머리에 방공 방첩을 새기며 수없이 여수 부산 간을 지나다녔다.
애기섬Ⅱ (국민보도연맹)=여수의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여순항쟁 관련자들인데 이들은 1950년 7월 중순 전황에 따라 CIC(국군 특무대, 이후 보안사-기무사), 여수경찰서, 각 지서에 구금되었다가 당시 여수 주둔 중인 병력은 제15연대가 철수하면서 7월 16일, 23일에 걸쳐 12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을 총살 후 바다에 수장했다. 학살의 주체는 경찰, CIC 특무대, 15연대 헌병대였다. 1950년 6월 27일경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 및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처형하라”는 무전지시에 따른 것이다. 애기섬까지 가서 수장시킨 이유는 해류가 일본으로 흘러가서 시신이 여수 쪽으로 돌아오지 않아서였다. 이런 부분까지 생각하며 수장을 실행했던 실무자들이, 아니 그들에게 지시한 이승만 정부가 치가 떨리게 무섭다는 것이다. 국가 권력이 이렇게 치밀하게 계산해서 자국민을 수장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전투를 통해서 국민을 지키지 못하고 자국민을 빨갱이로 몰아서 희생시킨 것이다. 학살에 가담한 CIC 특무대 요원의 증언은 눈을 가린 후 밧줄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총살 후 바다에 수장하였다고 했다. 그림 속의 한복을 입은 한 남자는 실제로 거기 있었을 거라 추정하는 분을 그렸다. 눈을 가리기 전에 자신의 가족이 사는 마을 쪽을 마지막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그 순간 그리운 아내와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식을 그리워하며 마음속으로 잘 살아주기를 기원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중에 억울한 한을 풀어달라고 하지 않았을까?수장에 사용된 흥안호는 처음 일제가 군선으로 사용하다가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대한민국 군선으로 사용했다. 6.25 이후에 이 한이 서린 배는 용도를 바꿔서 남해안 연안여객선으로 사용하였다.앞머리에 방공 방첩을 새기며 수없이 여수 부산 간을 지나다녔다.

 

 

 

 

 

 

 

 

 

 

 

 

 

 

 

 

 

■잉구부 (연등동) 전투=1948년 10월 24일 발생한 전투로 왼쪽으로 구부러진 지형 때문에 완구부인데 여수 사람들이 안구부 발음을 잘 못해 잉구부로 불렀다. 여수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고 당시는 버스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큼 좁은 협공이가 매복하기 적당한 장소였다. 진압군은 큰 확성기로 여수 시가지를 다니며 투항 방송을 하고 다녔다. 몇 번 시가지를 돌고 잉구부를 지나고 있었던 진압군은 여수 인민위원회가 조직한 봉기군의 매복 작전에 걸려들었다. 저항군은 14연대 봉기군, 여수시민과 청년 학생들로 구성되어 싸웠고 이 과정에서 송호서 총사령관이 저격을 받아 귀 고막이 터지고 허리를 크게 다쳤고 미군 종군기자가 사망했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배했다. 진압군은 이 전투 패배 후 미평에서 보복으로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했으며 군은 이 전투를 미평 전투라고 한다. 잉구부 전투 후 14연대 반군은 산으로 숨어들고 여수시민과 청년 학생들만 여수에 남게 된다. 잉구부 전투 중 정기덕이라는 여성은 탄약을 나르던 중 진압군의 총탄에 죽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여순항쟁 중 정식으로 장례를 치른 유일한 사망자이다.
■잉구부 (연등동) 전투=1948년 10월 24일 발생한 전투로 왼쪽으로 구부러진 지형 때문에 완구부인데 여수 사람들이 안구부 발음을 잘 못해 잉구부로 불렀다. 여수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고 당시는 버스 한 대가 겨우 다닐 만큼 좁은 협공이가 매복하기 적당한 장소였다. 진압군은 큰 확성기로 여수 시가지를 다니며 투항 방송을 하고 다녔다. 몇 번 시가지를 돌고 잉구부를 지나고 있었던 진압군은 여수 인민위원회가 조직한 봉기군의 매복 작전에 걸려들었다. 저항군은 14연대 봉기군, 여수시민과 청년 학생들로 구성되어 싸웠고 이 과정에서 송호서 총사령관이 저격을 받아 귀 고막이 터지고 허리를 크게 다쳤고 미군 종군기자가 사망했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배했다. 진압군은 이 전투 패배 후 미평에서 보복으로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했으며 군은 이 전투를 미평 전투라고 한다. 잉구부 전투 후 14연대 반군은 산으로 숨어들고 여수시민과 청년 학생들만 여수에 남게 된다. 잉구부 전투 중 정기덕이라는 여성은 탄약을 나르던 중 진압군의 총탄에 죽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여순항쟁 중 정식으로 장례를 치른 유일한 사망자이다.

 

■ 14연대 순천 입성=여수 주둔 14연대 병사들은 20일 새겹ㄱ 5시경에 여수 시내의 중요 기관을 모두 장악하고 순천을 향한 북상 기차에 올랐다. 여수역에 집결한 14연대 봉기군은 기차에 모든 병력이 탈 수없어서 일부는 기차 지붕 위로 올라가 탑승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육로로 차량에 탑승해 순천에 입성하였다. 봉기군의 기차는 20일 오전 순천역에 도착하였다. 당시 순천에는 14연대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가 파견되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김지회 중위가 이끌고 도착한 14연대 병사들과 합류하였다. 지리산으로 입산하려했던 봉기군은 순천역에서 더 이상 북상할 수 있어 순천 철도 사무소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순천 시내로 진입하기 위한 공격을 준비하였다.
■ 14연대 순천 입성=여수 주둔 14연대 병사들은 20일 새겹ㄱ 5시경에 여수 시내의 중요 기관을 모두 장악하고 순천을 향한 북상 기차에 올랐다. 여수역에 집결한 14연대 봉기군은 기차에 모든 병력이 탈 수없어서 일부는 기차 지붕 위로 올라가 탑승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육로로 차량에 탑승해 순천에 입성하였다. 봉기군의 기차는 20일 오전 순천역에 도착하였다. 당시 순천에는 14연대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가 파견되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김지회 중위가 이끌고 도착한 14연대 병사들과 합류하였다. 지리산으로 입산하려했던 봉기군은 순천역에서 더 이상 북상할 수 있어 순천 철도 사무소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순천 시내로 진입하기 위한 공격을 준비하였다.

 

■아, 여순이여! Ⅱ=여수시는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바다를 막아서 시가지를 만들고 계획한 도시이다.일본인들이 많이 살아서 적산가옥이 목포나 군산만큼 있었으며 시모노세키까지 물자를 수탈하기 위한 직통 연락선이 있었다. 이런 여수를 진압군은 진압의 명분으로 폭격과 방화를 했다. 서교동 산자락 가까이에 포격으로 인한 여수 시내의 불! 얼마나 심판 포격과 방화인지 집들이 전소되고 전선들은 끊어졌다.거의 초토화된 여수, 다가올 겨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디서 찬바람을 막으며 살았을까? 당시의 여수를 달래주고 싶은 소녀의 마음은 여순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작가는 여순으로 희생된 모든 사람들에게 소녀가 되어 동백을 바친다.
■아, 여순이여! Ⅱ=여수시는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바다를 막아서 시가지를 만들고 계획한 도시이다.일본인들이 많이 살아서 적산가옥이 목포나 군산만큼 있었으며 시모노세키까지 물자를 수탈하기 위한 직통 연락선이 있었다. 이런 여수를 진압군은 진압의 명분으로 폭격과 방화를 했다. 서교동 산자락 가까이에 포격으로 인한 여수 시내의 불! 얼마나 심판 포격과 방화인지 집들이 전소되고 전선들은 끊어졌다.거의 초토화된 여수, 다가올 겨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디서 찬바람을 막으며 살았을까? 당시의 여수를 달래주고 싶은 소녀의 마음은 여순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작가는 여순으로 희생된 모든 사람들에게 소녀가 되어 동백을 바친다.

 

■파란새=이 작품은 본인의 할아버지에 대한 작품이다. 저 다리 밑(광천교)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직접 깎은 참나무로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때리고 즉결 처형해서 황몽둥이(황영환)라는 별명이 있는 광천지서 주임인 황몽둥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남동생을 고문했다. 죄명은 좌익도 아닌 좌익 활동이었다. 여수 14연대 빨치산의 쌀을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옮겨줬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남동생은 주암국민학교에서 몸에 파란 잉크가 뿌려져 좌익으로 분류되고 끌려 나와 다리 밑에서 총살되었다.그림에서 날은 화사해서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너무나 아름다운 남도의 봄인데...어머니(할머니)는 어린 아기(고모)를 업고 소년(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현장에 서있다.어머니는 시신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며 발을 떼지 못한다.“엄니, 저것이 뭐당가?” 소년은 처음 보는 파란새(할아버지의 영혼)를 보며 어머니의 팔을 끌어당긴다.파란새는 동화 속 희망의 파랑새가 아니다. 공부를 하지 못하고 집안의 생계를 지게에 짊어지고 파란만장한 생을 살아나가야 할 소년의 운명을 말해주는 파란새다.
■파란새=이 작품은 본인의 할아버지에 대한 작품이다. 저 다리 밑(광천교)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직접 깎은 참나무로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때리고 즉결 처형해서 황몽둥이(황영환)라는 별명이 있는 광천지서 주임인 황몽둥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남동생을 고문했다. 죄명은 좌익도 아닌 좌익 활동이었다. 여수 14연대 빨치산의 쌀을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옮겨줬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남동생은 주암국민학교에서 몸에 파란 잉크가 뿌려져 좌익으로 분류되고 끌려 나와 다리 밑에서 총살되었다.그림에서 날은 화사해서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너무나 아름다운 남도의 봄인데...어머니(할머니)는 어린 아기(고모)를 업고 소년(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현장에 서있다.어머니는 시신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며 발을 떼지 못한다.“엄니, 저것이 뭐당가?” 소년은 처음 보는 파란새(할아버지의 영혼)를 보며 어머니의 팔을 끌어당긴다.파란새는 동화 속 희망의 파랑새가 아니다. 공부를 하지 못하고 집안의 생계를 지게에 짊어지고 파란만장한 생을 살아나가야 할 소년의 운명을 말해주는 파란새다.

 

■ 벌교 인민대회=1948년 1월 20일 제14연대 봉기군은 여수, 순천을 거쳐 일부는 구례, 곡성, 남원 등 북쪽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학구 쪽으로 나갔다. 다른 일부 경상도 지방 진출을 위해 광양, 하동 등 동쪽 방향으로 나머지 일부는 광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 보성, 하순, 등 서쪽으로 진격했다.1948년 10월 21일 오후 봉기군은 순천 별량면, 보성군 벌교리, 조성면, 악안면 4개 경찰서를 접수했다. 22일 이들은 벌교 전 지역을 장악했고 곧 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 인민대회가 벌교 중심지역에서 열렸다. 일제강점기에 벌교 지역에서는 사회운동, 농민운동이 활발했다. 대지주와 소작인인 많아 소작료 문제로 갈등이 심했고 좌익들이 주장하는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재가 농민들한테 지지를 얻었던 곳이다. 인민대회에 참석하려고 벌교의 상징인 부용교를 걸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후 소화다리는 좌익이 익을 학살하고 다시 우익들이 벌교를 장악한 후에는 우익이 좌익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진 비극의 다리다.
■ 벌교 인민대회=1948년 1월 20일 제14연대 봉기군은 여수, 순천을 거쳐 일부는 구례, 곡성, 남원 등 북쪽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학구 쪽으로 나갔다. 다른 일부 경상도 지방 진출을 위해 광양, 하동 등 동쪽 방향으로 나머지 일부는 광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 보성, 하순, 등 서쪽으로 진격했다.1948년 10월 21일 오후 봉기군은 순천 별량면, 보성군 벌교리, 조성면, 악안면 4개 경찰서를 접수했다. 22일 이들은 벌교 전 지역을 장악했고 곧 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 인민대회가 벌교 중심지역에서 열렸다. 일제강점기에 벌교 지역에서는 사회운동, 농민운동이 활발했다. 대지주와 소작인인 많아 소작료 문제로 갈등이 심했고 좌익들이 주장하는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재가 농민들한테 지지를 얻었던 곳이다. 인민대회에 참석하려고 벌교의 상징인 부용교를 걸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후 소화다리는 좌익이 익을 학살하고 다시 우익들이 벌교를 장악한 후에는 우익이 좌익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진 비극의 다리다.

 

■ 종산초등학교=여순항쟁 당시 진압군의 방화와 박격포 공격으로 불탄 여수 시내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압군은 초등학교나 공설운동장 같은 곳으로 모이라 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수색하며 집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발견하는 대로 사살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간단한 짐만 챙겨 나왔다. 나온 사람들은 마음 졸이며 좌익과 좌익을 도운 사람인지 아닌지 심판을 받았다. 때론 손가락 총에 바로 처형되기도 했다.어렸을 때 자주 놀러 다녔던 중앙초등학교가 그렇게 무서운 곳인지 몰랐다. 서국민학교와 함께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서는 직결 처형이 이루어졌던 곳이다.각지에서 1차 심사를 통해 끌려온 사람들과 각 지방에서 끌려온 좌익이나 가담자들이 수용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색출된 120여 명은 만성리굴 너머에서 총살과 화장이 이루어졌다. 그 악마 김종원 대위(자칭 백두산 호랑이)가 일본도로 지치도록 사람들의 목을 쳤던 곳이기도 하다.죽음의 공포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납작 엎드려 있다가 가축처럼 끌려가는 사람들... 이들의 주검을 리영희 선생님은(저서: 역정) 멸치가 널려있는 모습으로 묘사를 했다.아이가 한없이 아버지를 기다린다. 주저앉아 지쳐서 운동장 바닥에 아버지를 써 본다. 아버지는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것입니다. 풀들도 드러누웠다. 그러나 민초들은 다시 일어 날 것이다. 아이도 닥쳐올 모진 고난을 견디며 아버지를 증언 할 것이다. 국가의 폭력에 속절없이 희생당한 분들과 그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림이길 바란다.
■ 종산초등학교=여순항쟁 당시 진압군의 방화와 박격포 공격으로 불탄 여수 시내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압군은 초등학교나 공설운동장 같은 곳으로 모이라 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수색하며 집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발견하는 대로 사살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간단한 짐만 챙겨 나왔다. 나온 사람들은 마음 졸이며 좌익과 좌익을 도운 사람인지 아닌지 심판을 받았다. 때론 손가락 총에 바로 처형되기도 했다.어렸을 때 자주 놀러 다녔던 중앙초등학교가 그렇게 무서운 곳인지 몰랐다. 서국민학교와 함께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서는 직결 처형이 이루어졌던 곳이다.각지에서 1차 심사를 통해 끌려온 사람들과 각 지방에서 끌려온 좌익이나 가담자들이 수용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색출된 120여 명은 만성리굴 너머에서 총살과 화장이 이루어졌다. 그 악마 김종원 대위(자칭 백두산 호랑이)가 일본도로 지치도록 사람들의 목을 쳤던 곳이기도 하다.죽음의 공포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납작 엎드려 있다가 가축처럼 끌려가는 사람들... 이들의 주검을 리영희 선생님은(저서: 역정) 멸치가 널려있는 모습으로 묘사를 했다.아이가 한없이 아버지를 기다린다. 주저앉아 지쳐서 운동장 바닥에 아버지를 써 본다. 아버지는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것입니다. 풀들도 드러누웠다. 그러나 민초들은 다시 일어 날 것이다. 아이도 닥쳐올 모진 고난을 견디며 아버지를 증언 할 것이다. 국가의 폭력에 속절없이 희생당한 분들과 그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림이길 바란다.

 

■쫑포에서
■쫑포에서

 

▲ 박금만 作
▲ 박금만 作

 

■ 거기에도 꽃은 피는구나! (검사 박찬길)=순천지청 박찬길 검사는 황해도 은율군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그를 교회에서 인재양성 목적으로 장학금을 주어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그렇게 검사가 되었다. 가족은 그가 검사가 되기 위해 시간을 아껴가며 독하게 공부했다고 증언한다.순천의 억울한 죽음을 상징하는 박찬길 검사는 여순 당시 관사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잡혀 아버지와 함께 순천농림중학교에서 가까운 들판에서 총살당했다. 가족은 그의 시신도 거두지 못했다. 그의 죄명은 인민재판장을 맡았다는 것이었으나 그를 죽이기 위한 모략이었다. 그는 좌익혐의자를 잡기 위해 산벌꾼을 재차 확인사살까지 한 경찰에게 무거운 구형을 내렸다. 그 보복으로 박찬길 검사를 좌익혐의자로 몰아 죽인 것이다.칼 마이던스의 사진 원본 속 처형장의 들판에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고 그 뒤 언덕으로 꽃이 피어있었다. 무심하게 시월에 그 황당한 자리에 피어서 그의 피를 마시며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꽃은 피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죽음은 들판에서 자연의 일부로 사라졌으며 국가폭력의 하수인들이 원하는 대로 사라져 갔으며 잊혀져 갔다. 그러나 무죄를 목이 터져라 주장하던 그의 정신은 그 자리에서 70여 년을 흐르다가 다시 증거한다.
■ 거기에도 꽃은 피는구나! (검사 박찬길)=순천지청 박찬길 검사는 황해도 은율군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그를 교회에서 인재양성 목적으로 장학금을 주어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그렇게 검사가 되었다. 가족은 그가 검사가 되기 위해 시간을 아껴가며 독하게 공부했다고 증언한다.순천의 억울한 죽음을 상징하는 박찬길 검사는 여순 당시 관사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잡혀 아버지와 함께 순천농림중학교에서 가까운 들판에서 총살당했다. 가족은 그의 시신도 거두지 못했다. 그의 죄명은 인민재판장을 맡았다는 것이었으나 그를 죽이기 위한 모략이었다. 그는 좌익혐의자를 잡기 위해 산벌꾼을 재차 확인사살까지 한 경찰에게 무거운 구형을 내렸다. 그 보복으로 박찬길 검사를 좌익혐의자로 몰아 죽인 것이다.칼 마이던스의 사진 원본 속 처형장의 들판에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고 그 뒤 언덕으로 꽃이 피어있었다. 무심하게 시월에 그 황당한 자리에 피어서 그의 피를 마시며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꽃은 피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죽음은 들판에서 자연의 일부로 사라졌으며 국가폭력의 하수인들이 원하는 대로 사라져 갔으며 잊혀져 갔다. 그러나 무죄를 목이 터져라 주장하던 그의 정신은 그 자리에서 70여 년을 흐르다가 다시 증거한다.
■동네 형, 청암이 형=여수 진압 막바지인 10월 26일 저녁 무렵 대판통에서 시민과 청년 학생들은 진압군과 교전을 벌인다. 무기과 병력에 밀린 시민과 청연 학생들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날은 저물어 가고 진남관 하늘 위에서는 투항하라는 삐라가 날린다, 같이 싸우던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점점 조여오는 진압군의 압박에 무섭고 두려워 좌절하고 있는 동네 후배에게 “괜찮아, 내가 같이 싸워줄게”하며 어깨를 감싸주는 그는 다정하고 의리 있는 동네 형 청암이 형이다. 청암도 두려웠다. 그러나 왜 총을 들었나 생각하며 다시 총을 움켜쥐며 결코 도망가지 않을 것을 다집한다. 이들은 서러 믿으며 끝까지 싸우다 그 길에서 죽는다. 실제로 청암은 18세로 여수 시내에 거주했다. 그는 장남으로 가정 형편상 양복점 점원으로 낮에 일하고 밤에는 여수공업중학교를 다니는 고학생이었다. 일하면서 경찰들과 관리들이 어떻게 여수시민들을 억압하고 착취를 했었는지 그는 똑똑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는 공부하는 학생으로 1948년 10월 19일 14연대의 봉기로 촉발된 여순항쟁에 함께 한 것이다. ​
■동네 형, 청암이 형=여수 진압 막바지인 10월 26일 저녁 무렵 대판통에서 시민과 청년 학생들은 진압군과 교전을 벌인다. 무기과 병력에 밀린 시민과 청연 학생들은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날은 저물어 가고 진남관 하늘 위에서는 투항하라는 삐라가 날린다, 같이 싸우던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점점 조여오는 진압군의 압박에 무섭고 두려워 좌절하고 있는 동네 후배에게 “괜찮아, 내가 같이 싸워줄게”하며 어깨를 감싸주는 그는 다정하고 의리 있는 동네 형 청암이 형이다. 청암도 두려웠다. 그러나 왜 총을 들었나 생각하며 다시 총을 움켜쥐며 결코 도망가지 않을 것을 다집한다. 이들은 서러 믿으며 끝까지 싸우다 그 길에서 죽는다. 실제로 청암은 18세로 여수 시내에 거주했다. 그는 장남으로 가정 형편상 양복점 점원으로 낮에 일하고 밤에는 여수공업중학교를 다니는 고학생이었다. 일하면서 경찰들과 관리들이 어떻게 여수시민들을 억압하고 착취를 했었는지 그는 똑똑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는 공부하는 학생으로 1948년 10월 19일 14연대의 봉기로 촉발된 여순항쟁에 함께 한 것이다. ​
▲ 박금만 作
▲ 박금만 作

 

 박금만 作
▲ 박금만 作

 

■14연대 섬진강 도하
■14연대 섬진강 도하

 

■애기섬=어렸을 때 오동도 뒤 쪽으로 보이는 엄마섬과 아기섬(남해 소치도)이 서로 붙으면 통일된다는 동네 형들 말을 믿었다.그 전설이 알고 보니 1950년 6.25가 터지자 여수지역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여순항쟁 때 감옥에 넣은 사람들 120여 명을 애기섬으로 끌고 가 총살한 뒤 수장했던 것이다.애기섬에서 일본 쪽으로 해류가 흘러가서 시신이 여수 쪽으로 오지 않아 그 장소에 수장을 시킨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흥안호는 여수 부산 간 여객선으로 썼다. 흥안호에 수많은 원혼들이 억울함으로 울고 있었을 것이다.그림에서 그날도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해야 할 소년이 어디론가 끌려갔던 아버지가 보고 싶어 애기섬을 보면서 목청껏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애기섬=어렸을 때 오동도 뒤 쪽으로 보이는 엄마섬과 아기섬(남해 소치도)이 서로 붙으면 통일된다는 동네 형들 말을 믿었다.그 전설이 알고 보니 1950년 6.25가 터지자 여수지역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여순항쟁 때 감옥에 넣은 사람들 120여 명을 애기섬으로 끌고 가 총살한 뒤 수장했던 것이다.애기섬에서 일본 쪽으로 해류가 흘러가서 시신이 여수 쪽으로 오지 않아 그 장소에 수장을 시킨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흥안호는 여수 부산 간 여객선으로 썼다. 흥안호에 수많은 원혼들이 억울함으로 울고 있었을 것이다.그림에서 그날도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해야 할 소년이 어디론가 끌려갔던 아버지가 보고 싶어 애기섬을 보면서 목청껏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별과 새에게 (교장 송욱)=송욱 교장은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법과를 졸업한 후 1938년 서울 상명여학교에서 교사 일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영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송욱 교장은 1948년 광주서중 교감을 거쳐 여수여중으로 영전해 간 지 1년여만에 여순 사건을 맞았다. 그런나 여순사건을 진압한 정부와 국방부는 여순사건 ‘민간인 총연합 지휘자’로 송욱 교장을 지목했다. 육군참모장 정일권 대령은 10월 26일 국방부 출입 기자단에 “여수 발란 총지휘자는 여수여중 교장”이라고 발표했다.그는 오동도로 끌려간 이후 행방불명된다. 송욱교장은 대단한 인품의 소유자로 모두들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아마도 여수시민들은 나라가 변란을 맞았을 때 그가 지도해 주길 원했을 것이다. 그는 인민대회 연설자로 올라 반란의 총지휘자로 죽음을 맞이 한다, 그의 시 “별과 새에게”는 그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
■ 별과 새에게 (교장 송욱)=송욱 교장은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법과를 졸업한 후 1938년 서울 상명여학교에서 교사 일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송욱 교장은 1948년 광주서중 교감을 거쳐 여수여중으로 영전해 간 지 1년여만에 여순 사건을 맞았다. 그런나 여순사건을 진압한 정부와 국방부는 여순사건 ‘민간인 총연합 지휘자’로 송욱 교장을 지목했다. 육군참모장 정일권 대령은 10월 26일 국방부 출입 기자단에 “여수 발란 총지휘자는 여수여중 교장”이라고 발표했다.그는 오동도로 끌려간 이후 행방불명된다. 송욱교장은 대단한 인품의 소유자로 모두들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아마도 여수시민들은 나라가 변란을 맞았을 때 그가 지도해 주길 원했을 것이다. 그는 인민대회 연설자로 올라 반란의 총지휘자로 죽음을 맞이 한다, 그의 시 “별과 새에게”는 그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
■ 오동도=아름다운 관광지 오동도가 좌익과 우익의 선별지이며, 좌익으로 몰린 사람들의 학살 장소였다. 진압군과 경찰은 인간 사냥을 했다. 총살 직전 도망친 사람들을 시누대 숲 사이로 토끼몰이 하듯 사람들을 쫓아가며 인간 사냥을 했다.묶여서 대숲 사이를 도망 다녔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직접 아버지의 옷을 입고 그들처럼 대숲 사이를 도망쳐 다녀봤다. 우지직 몸에 닿아 부서지는 대나무의 파열음, 발에 찔리는 대나무 조각들···그림 속 주인공은 쫓기며 두렵거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아니다. 조용히 웃고 있다. 쫓은 자들을 비웃으며 밝게 보이는 빛을 향해 걸어간다. 그들의 총에 죽기 싫어 해변이 바라보이는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그림 속 대숲의 끝 저 밝은 빛은 차라리 희망이었다.
■ 오동도=아름다운 관광지 오동도가 좌익과 우익의 선별지이며, 좌익으로 몰린 사람들의 학살 장소였다. 진압군과 경찰은 인간 사냥을 했다. 총살 직전 도망친 사람들을 시누대 숲 사이로 토끼몰이 하듯 사람들을 쫓아가며 인간 사냥을 했다.묶여서 대숲 사이를 도망 다녔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직접 아버지의 옷을 입고 그들처럼 대숲 사이를 도망쳐 다녀봤다. 우지직 몸에 닿아 부서지는 대나무의 파열음, 발에 찔리는 대나무 조각들···그림 속 주인공은 쫓기며 두렵거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아니다. 조용히 웃고 있다. 쫓은 자들을 비웃으며 밝게 보이는 빛을 향해 걸어간다. 그들의 총에 죽기 싫어 해변이 바라보이는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그림 속 대숲의 끝 저 밝은 빛은 차라리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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