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기기념사업회, 故 류인 조명 학술세미나 개최
미술사학자 최열 “20세기 황폐한 인간상 형상화”
“손상기-류인 여수 연고, 지역의 소중한 자산으로”

급행열차_시대의변 1991 bronze 118x1550x220cm. (자료=손상기기념사업회)
급행열차_시대의변 1991 bronze 118x1550x220cm. (자료=손상기기념사업회)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여수 출신이거나 여수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작품 활동을 하다 작고한 작가 5명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전남 최초의 서양화가이며 선구자인 김홍식(1897~1966) 화백, 추상회화의 대가인 류경채(1920~1995) 화백, 여수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말년에 여수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 한국 수채화의 거장 배동신(1920~2008) 화백,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절망을 예술로 승화시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 손상기(1949~1988) 화백 등이다. 그리고 추상과 설치작업이 지배적이던 1980년대 한국 화단에서 인체를 매개로한 작품으로 한국 구상조각에 큰 획을 그은 천재 조각가로 불리는 故 류인(1956∼1999)이 있다.

류인은 한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하고, 제1회 국전 대통령상을 받은 여수 돌산 출신 서양화가 류경채의 막내아들로 195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홍익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류인은 1993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인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고 1999년 제1회 한국일보 청년작가 초대전에서 우수상을 받는 등 국내 구상조각 대표 작가로 치열하게 활동하다 간경화 악화로 향년 43세로 타계했다. 그는 조각과 설치 70여 점을 남겼다.
 

故 류인 조각가. (자료=손상기기념사업회)
故 류인 조각가. (자료=손상기기념사업회)

희소식은 류인의 유족이 고인의 작품과 작가의 격정적 삶을 엿볼 수 있는 드로잉, 작업 노트, 작업 도구 등을 기증할 의사를 밝혔다는 점이다. 여수시는 남산공원에 작품을 전시하는 방안, 시립미술관을 활용하는 방안 등에 대해 유족과 협의하고 있다.

사실 그동안 지역사회에서는 여수의 소중한 자산인 이들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 그나마 2007년 발족한 손상기기념사업회가 손 화백의 삶과 작품을 조명하고 생가 복원, 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해 왔으나 실질적인 성과는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보면 푸대접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故 류인을 재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돼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2일 오후 2시 전남 여수시 여수시청 내 여수문화홀에서 지역 문화예술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손상기기념사업회가 마련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화가 이중섭과 추사 김정희, 김복진·권진규 평전으로 유명한 미술사학자 최열 작가가 ‘20세기의 신화, 요절작가 류인’을, 미술사학자 조은정 고려대 교수가 ‘시대의 상징, 류인의 조각 언어’를 주제로 발제에 나섰다.
 

화가 손상기‧조각가 류인 학술세미나. (사진=마재일 기자)
화가 손상기‧조각가 류인 학술세미나. (사진=마재일 기자)

최열 작가는 류인이 여수가 배출한 류경채 화백의 아들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류인은 여수 가문이 배출한 조각가”라고 밝혔다. 최 작가는 “우리나라 20세기 구상조각의 3대 거장으로 첫째는 서구 근대조각을 한국미술계에 이식해 정착시킨 정관 김복진(1901~1940)이며, 둘째는 김복진에 이어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아름다움과 구원의 미학을 실현한 권진규(1922~1973)이다. 셋째로 꼽는 류인은 김복진·권진규를 계승하면서도 20세기 황폐한 시절의 인간상을 가장 절실하고도 격정적으로 형상화해 냈다”고 평가했다.

최 작가는 이어 “류인은 왜 그런 작품을 쏟아냈을까. 그리고 그렇게 빠르게 이 세상을 등졌을까. 이 질문에 마주치면 나는 여지없이 그 참혹한 여순사건(여수·순천 10·19사건)을 떠올린다”며 “그에게 내면화된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했다.

최 작가는 “류인은 자신의 작품을 가리켜 ‘바로 이 고깃덩어리’라고 표현했다”며 “비참함을 넘어서는 이 혐오스런 낱말이야말로 20세기 인류가 겪어야했던 비극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말했다. 최 작가는 또 “1988년 작품 ‘지각의 주(柱)’는 비참과 황홀, 고통과 아름다움이 하나로 덩어리진 혼돈의 세계”라며 “굴레와도 같은 기둥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육체의 위대한 임이 보기에도 황홀한 것은 고통스런 굴레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 작가는 “류인의 작품 세계가 지닌 비참함, 저 깊은 곳에서 내뿜고 있는 황홀함이야말로 아름다움의 뿌리라고 생각한다”며 “작품과 마주치는 순간 빠져드는 악몽 같은 전율이 어느덧 살 떨리는 환희로 전환되는 과정을 즐기고 있으면 내가 마치 마법사의 주술에 걸려든 순박한 소년이 된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지각의주_1988 bronze_145x170x253cm. (자료=손상기기념사업회)
지각의주_1988 bronze_145x170x253cm. (자료=손상기기념사업회)

조은정 고려대 교수는 “그의 작품에는 인간의 억압된 감정 또 그와는 상반된 폭발적인 감정의 양가성이 혼재해 있다. 비장하면서 유머가 있고, 유쾌하면서도 슬프고, 크지만 왜소하고, 작지만 한없이 커 보이는 그의 작품은 인간 마음속 깊이에 도사린 영웅성과 비겁함, 자신감과 좌절감 같은 어느 한쪽의 성향이라 인정하기에는 미흡한, 그래서 상처가 되어버린 인간 본연의 성정과 마주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손이나 상체 혹은 두 다리와 같이 신체 전체가 아닌 특정 부위에서 강조되는 비장함은 고대 조각의 파편화된 신체성이 주는 고귀함이나 영웅성과 연관돼 있다”고 했다.

조 교수는 “인간 신체의 부분들은 인간의 전체를 대변하는 형태로 작동하는데 근육을 통해 긴장과 이완의 폭발적 상황인 바르크적인 감각, 파토스적인 면모를 정교하게 구현했기 때문에 류인의 작품은 신체로서 강렬한 인상을 준다”며 “류인이 보여주는 인체는 흔히 왜곡과 과장이 이르는 신화적 세계관이 아니라 일상의 삶, 정치적 현실의 현대사와 같은 현상을 반추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조 교수는 특히 “류인 작품 인체의 가장 큰 특징인 ‘강력한 남성성’은 그의 작품 목적이 에너지, 힘의 표현이었던 때문일 것”이라며 “자신의 존재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 작품을 생산하는 원동력이기에 그것이 어떠한 성(性)이 아닌, 원형으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또한 폭력이며 부조리함으로 가득한 그가 살던 사회, 그 구조의 부조리한 상황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것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부활_조용한 새벽 1993 bronze iron 350x80x190(h)cm. (자료=손상기기념사업회)
부활_조용한 새벽 1993 bronze iron 350x80x190(h)cm. (자료=손상기기념사업회)
파란II 1986 bronze 85x110x235cm. (자료=손상기기념사업회)
파란II 1986 bronze 85x110x235cm. (자료=손상기기념사업회)

우종완 손상기기념사업회 회장은 인사말에서 “오늘은 여수의 숨은 거인 손상기와 류인이 만나는 의미 있는 날”이라며 “이번 세미나를 통해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과 가치를 높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우 회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손상기와 류인은 요절한 천재라 불린 예술가이면서 여수에 연고를 가진 공통점이 있다”며 “두 거인을 기리고 지역의 소중한 자산으로 함께 가꿔가자는 의미에서 이번 세미나를 마련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우 회장은 남원시가 춘향테마파크 내에 건립한 ‘김병종미술관’을 언급하며 문화적 가치가 지닌 시너지를 강조했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남원 출신의 ‘화첩기행’으로 유명한 한국화가 김 서울대 명예교수가 작품 400여 점과 자료 5000여 점을 기증했다.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됐는데 100곳 중 미술관은 김병종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뮤지엄 산 등 3곳뿐이다.

마재일 기자 killout13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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