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필 여순사건 실무위원회 위원.
최경필 여순사건 실무위원회 위원.

지난 1월 21일부터는 전남도와 각 시군에서 여순 10·19 사건 피해자 접수가 시작됐다. 74년여 만에 그날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날의 참상을 직접 경험한 생존자는 많지 않다. 또렷하게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 역시 그 수가 매우 적다.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이가 8살쯤 된다고 치면 그날의 8살은 올해 82세가 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는 그보다 더 많은 80대 중반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미 돌아가신 가족에게 전해 들은 내용으로 유가족이 증언할 수도 있지만 사망 시기나 장소 등이 정확지 않은 사례가 많다.

게다가 당시 희생자 대부분은 20대 청년들이란 점도 염두해 봐야 한다. 기혼자 경우 그 직계 후손은 연좌제에 걸려 차별당했고 미혼자는 행불 처리되거나 호적에서조차 지워진 경우가 많았다. 홀로 남은 아내가 재혼하면서 희생자와 가족관계가 단절된 자녀들도 많다.

이번 진상규명 대상자는 대부분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5년 4월 1일까지 전남·북과 경남에서 군경이나 우익 청년 또는 14연대 봉기군과 인민군 및 좌익에게 현장에서 희생된 분들이다. 여기에 여순사건 당시 군사재판을 거쳐 전국 형무소에서 수감 중 6·25전쟁이 발생하면서 1950년 7월경에 학살당한 희생자도 대상자에 해당한다.

지역 범위는 전남 동부 6개 시군을 넘어 화순 백아산과 모후산 일대를 비롯해 장흥 유치면(수몰지구) 일대와 화학산 주변, 곡성지역 일부도 여순사건 당시 부역 혐의자 색출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봤다.

전북에서는 지리산 주변인 남원과 순창, 임실 등지에서도 피해자가 발생했고 경남에서는 하동, 산청, 함양 등지에서 많은 피해가 났다. 여순사건 당시 재판받고 수감된자 중에는 후에 경북 경산 코발트 사건에서 희생된 이도 존재해 그 피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졌는지 알 수 있다.

이들 모두를 조사해야 여순 10·19 사건의 전체 피해 규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기 진실과화해위원회에서는 순천, 여수, 고흥, 보성, 구례 지역의 경우 독립된 피해보고서를 발표했고, 광양은 군경희생자 사건으로 6·25 전쟁까지 포함해 피해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신고자 위주로 조사를 하다 보니 제대로 조사를 하지 못했다. 특히 광양과 구례는 용역조사를 통해 희생자 명단까지 확보되었음에도 진실규명 대상에서는 제외되는 아픔이 있었다.

당시 전남도 발표는 1만 명이 넘지만 피해 접수는 더디기만 하다. 아직도 정부를 믿지 못해 신고를 꺼리는 이들도 있고 과거 상처를 꺼내고 싶지 않은 유족들의 반발심리도 있다. 오랫동안 연좌제로 피해를 봤던 유족들은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직권조사는 필수 불가결하다. 특히 고흥군과 보성군은 그동안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못했다. 2005년 고흥지역 시민단체가 자력으로 조사를 했지만 당시 제보 위주로 하다 보니 전 지역 조사는 못했고, 보성군은 웅치면, 율어면 등 일부지역 면지 작성과정에서 피해 규모가 포함됐을 뿐이다.

1기 진화위에서 발표한 여순사건 지역별 보고서에서 순천, 고흥, 보성, 구례는 여순사건을 '반란'이라고 명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발표한 여수지역 보고서에는 '반란'이라고 규정됐다. 다른 지역은 '반란'이 아닌데 여수만 '반란'이 됐다면 이 보고서는 다시 작성돼야만 한다.

당시 여수에서 파견된(?) 인사가 진실과화해위원회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음에도 '반란'으로 기록된 점, 다른 지역에서는 희생자 추정치가 나왔는데 여수 보고서에만 그 수치마저 빠진 점은 다시 생각해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 여순사건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상당 기간 연구한 학자라면 '반란'이라는 주홍글씨가 여수지역 보고서에 적시되는 것을 목숨 걸고 막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 올바른 진상규명의 길은 이처럼 멀기만 하다. 하지만 정부와 지자체가 협조만 해준다면 제주4·3 보다 더 신속하게 진상규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사회가 서로 협력하고 화합해야 할 것이다.

여순사건이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것도 잘못이다. 그래서 명칭도 '여순'이 아닌 전체지역을 포괄한 새로운 정명이 필요하다는 시각도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여순'은 여수와 순천이라는 지역명을 떠나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사건을 대변하는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도 있다.

여수나 순천에서 희생된 죽음만 거룩하거나 소중한 것이 아니다. 지리산 골짜기나 보성 회천 바닷가에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의 생명이 안타깝고 규명돼야 할 진실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를 반드시 명심하며 남은 날까지 계속해서 그 진실을 밝혀가야 할 것이다.

<최경필 여순사건 실무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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