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수필문학회 '민들레 홀씨' 제3집

곽경자 수필가 "고소동은 전쟁 중"

백 사십여 계단을 오르내리며 직장에 다니던 때가 있었다. 고소동 꼭대기, 전세 사만 오천 원짜리 방 한 칸에서 쌍둥이 아들 둘과 막내딸 그리고 친정엄마와 우리 부부 이렇게 살았다. 내가 직장을 다녀야 하니 친정엄마가 우리 아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했다. 그때 남편은 건설 회사를 하는 형님을 도와서 객지를 많이 돌아다녀야 했기에 그 좁은 단칸방에서도 살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장군도가 먼저 아침 인사를 하고 봄이면 돌산공원과 장군도에 눈송이처럼 피어있던 벚꽃도 눈에 선하다. 아이들의 젖을 먹여야 했었기에 백 사십여 계단을 아침에 내려가서 점심때 올라오고 하루에도 몇 번씩을 오르내렸다. 그 계단이 지금은 벽화 골목으로 예쁜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소동은 산동네였다. 그래도 인정만큼은 어느 부자 동네 부럽지 않을 정도로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마음의 부자들이 살고 있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들이었지만 그 산동네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서로를 아껴주는 마음들이 깊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형님 일을 그만두고 개인회사에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모두 경제가 어려워 개인회사는 몇 개월씩 월급이 밀리는 것이 예사였다. 그래서 너도나도 가난을 어깨에 지고 살았다. 어떤 이들은 가난한 시절을 이야기할 때 눈물을 흘리는데 우리에겐 가난은 했지만 참 행복한 기억들이 많은 시절이었다. 젊이 있어 두렵지 않고 마냥 행복했다.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보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였다, 고소동 사람들은 누구 하나 잘사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살아낸 고소동 사람들이다. 그래도 지금은 그곳에 터를 잡고 집 한 칸씩이라도 가지고 살고 있다. 자식들은 거의 타지에 나가서 살고 있고 허리가 휘도록 살아낸 세월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동네 집 한 채뿐이다. 지금은 전망 좋다는 곳이다. 그들은 지금도 집 한 칸뿐 노후를 걱정할 겨를도 없이 몸은 어느새 노구가 되어있고 노후 대비 하나 해놓지 않은 사람들이 아마도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고소동 일대가 전쟁 중이다. 전망 좋은 곳에 새 건물이 들어서고 카페가 생기고 벽화 골목이 생겨서 주말이면 젊은이들이 찾는 활기찬 동네가 되어가고 있다. 겨우 몇 천만 원 하던 집값이 부르는 것이 가격이고 모두가 억 소리 나는 집이 되었다. 집을 팔아 몇 억을 손에 쥐고 고소동을 떠나는 사람도 많다. 그렇게 전망 좋다는 그곳, 그런데도 그때는 그 전망을 누려볼 마음의 여유들이 없었을 것이다. 아침저녁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언제 그 전망 한 번 누려보았으랴 싶다. 그래도 그때 고생하며 살던 세월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집값이 오르고 나니 부모님의 어깨에도 힘이 좀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 그토록 가난하게 살았던 고소동 시절이 제일 많이 생각나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가난은 불편할 뿐이지 부끄러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정말이지 가난은 조금 불편할 뿐이었다. 젊음이 있어 이겨낼 수 있었기에 더 소중하게 기억되는 것이다.

지금은 밤이면 별천지가 되어있는 고소동에서 가끔은 차 한 잔의 여유를 부리면서 여수 밤바다를 내려다본다. 참 아름다운 곳에서 우리의 젊음을 보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그때의 추억들이 영화처럼 스쳐 간다. 고소동은 나에게 참 많은 추억을 안겨준 아름다운 곳으로 남아 있다.

저작권자 © 뉴스탑전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