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지역 만세 운동 표면적으로 4월부터 시작
고향으로 돌아온 유봉목 선생이 만세시위 계획

▲1919년 3월 1일을 기념하는 3·1절이 올해로 제105주년을 맞이했다.<br>
▲1919년 3월 1일을 기념하는 3·1절이 올해로 제105주년을 맞이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국을 선언했던 1919년 3월 1일을 기념하는 3·1절이 올해로 제105주년을 맞이했다.

전남 여수지역은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 해군이 거문도에 해저전선과 무선 전신소를 설치하면서 1908년 당시 약 30여 명의 일본인이 거주했다. 1908년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어업권을 인정 받게 됐다. 1912년 여수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100가구로 일본인 사회가 새롭게 형성됐다.

1919년 일제의 무단통치는 민족·사회·경제적으로 심화했다.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교육방침에 관한 법령인 '조선교육령', 식민지적 토지제도를 확립할 목적으로 시행한 '토지조사사업' 회사를 설립할 경우 일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회사령'등의 법령이 반포됐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의 불만과 저항은 날로 고조되고 이를 기반으로 3·1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여수의 사회·경제적 사정이 좋지 못했다. 농업은 1911년 '다까세 농장'이 세워져 여수의 중소지주와 자작농과 소작농을 착취하고 있었다.

수산업은 '스끼사요 시노부'가 설립한 전남수산주식회사가 여수의 어획물 판매권을 독점하고 어시장을 통제하여 어민들의 삶을 더 옥죄었다. 공업쪽은 천일고무농장·여수조선철공주식회사·나까무라 조선소 등이 설립돼 노동자들의 처우가 매우 열악한 상황에 이르자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 3·1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당시 여수경찰서. (사진=여수시)<br>
▲당시 여수경찰서. (사진=여수시)

전라남도 지역의 시위 주도층은 주로 종교인, 청년과 학생, 유생층, 농민층이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다음 날 여수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됐다. 윤자환(여수군 화양면 창무리)는 순천군 해룡면사무소와 여수경찰서 게시판에 붙였다. 이 일이 여수 3·1운동의 시초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여수의 3·1운동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4월에 들어와서다. 4월 1일 쌍봉·소라·율촌에서는 오전 11시 각 마을마다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을 다 하고, 검거된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

남면·돌산·화정·삼산 각 면에서는 밤 9시에 산에 불을 놓고 태극기를 높이 달고 만세를 부르다 50여 명이 검거됐다. 이후 1919년 11월까지 여수에서 이렇다 할 만한 만세시위가 없다. 서울에서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유봉목이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서울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귀향한 유봉목(여수군 여수면 동정)은 1919년 6월 [독립신문]을 보고 고향인 여수에서는 활발한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여수수산학교 학생 이선우와 김동렬·김제봉·유병옥·유함사·하재학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20일 여수시장에서 대의를 도모하기로 결의했다.

1919년 8월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본 뒤, 자신도 독립운동을 벌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9월 고향인 종포로 돌아와 여수수산학교 학생인 이선우를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유봉목은 12월 12일 밤 여수수산학교 기숙사에서 이선우를 비롯한 김동렬·김주옥·유병옥·유함사·하재학 등을 만나 12월 20일, 여수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만세시위를 하기 위해 19일 덕충리 김여종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적발돼 시위 계획은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여수 출신 가운데 다른 지역의 3·1운동에 참여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형영 선생 [여수 서정 출생 1896. 7.4 ~ 1923.2.5 건국 포장]

▲이형영 선생. (사진=여수시)<br>
▲이형영 선생. (사진=여수시)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 부속 견습소 1년생으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학생 대표로서 동교생들에게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 독립선언식과 3월 5일 학생시위에 참가하도록 설득했다. 3월 1일 탑골공원에 나갔으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겨 독립선언을 하자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군중을 모아 시가행진을 벌였다.

 

김백평 선생 [여수 서정 출생 1900.8.20 ~1990.12.17 건궁훈장 애족장]

▲김백평 선생. (사진=여수시)<br>
▲김백평 선생. (사진=여수시)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3년생으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학교 대표 자격으로 조선독립선언서 200매를 받아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나눠주면서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 독립선언식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3월 1~5일 서울시민 시위에 합세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1년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귀향하여 1921년 5월경 맞돔회라는 청년회를 조직, 야학을 개설하고 한글을 가르치며 문맹퇴치와 항일사상 고취에 힘썼다.

윤형숙 선생 [화양 창무 출생 1900.9.13 ~ 1950.9.28 건국 포장]

▲윤형숙 선생. (사진=여수시)<br>
▲윤형숙 선생. (사진=여수시)

1919년 3월 10일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왼팔이 잘려 나감에도 오른팔로 떨어진 태극기를 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일본 헌병에 체포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심한 고문으로 오른쪽 눈마저 실명됐다.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과 4년 연금형을 선고 받았다.

 

유봉목 선생 [여수 동정 출생 1898.12.19~1945.2.5 건국훈장 애족장]

▲유봉목 선생. (사진=여수시)
▲유봉목 선생. (사진=여수시)

1919년 12월 20일 여수군 동면 청년회를 중심으로 여수 장날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여수면 덕충리 민가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거사를 준비하다가 일경에 발각돼 태극기 120여 장이 압수되고 청년회원 10명과 함께 체포됐다.

만세시위 계획이 좌절되자 청년회를 해산시킨 여수군수에게 살해 협박장을 송부했다. 192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1년여 옥고를 치렀다.

정두범 선생 [남면 우학 출생 1899.8.3 ~ 1956.5.21 건국훈장 애족장]

▲정두범 선생. (사진=여수시)
▲정두범 선생. (사진=여수시)

1919년 광주 숭일학교 학생대표로 3월 10일 광주 장날을 이용해 교사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사전준비를 했다. 당일 오후 1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합세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와 독립가 등을 배포하며 만세시위를 벌이다 일경에 체포됐다.

오지선 기자 newstop22@dbl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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