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에 대한 문제점-

▲ 주철희 역사연구자/칼럼리스트
박재훈 창작 ‘오페라 손양원’이 6월 1일부터 양일간 여수MBC 주최로 여수 공연을 앞두고 있다. 지난 3월 8일에서 11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이미 공연됐다. ‘오페라 손양원’의 제작에는 여수시 예산 1억5천만원이 지원됐다.

‘오페라 손양원’은 손양원 목사의 사랑과 순교에 대한 예술작품인 동시에 전남동부지역에서 있었던 여순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전개된다. 그렇다면 여수시는 오페라의 대본에 대해서 어느 정도 검증이나 확인이 있어야 했다.

아쉽게도 대본의 일부에는 전남동부지역의 아픈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여수시에서 예산을 지원한 ‘오페라 손양원’의 대본(김희보 작)에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은 ‘사랑의 원자탄’으로 널리 알려진 손양원 목사의 신앙심이나 순교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 둔다.

오페라 제1막의 No.4 Scene과 No.5 Scene은 사실과 다르다. 동인과 동신을 처형한 것으로 알려진 안재선은 14연대 군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14연대 군인과 동행하거나, ‘적기가’를 부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안재선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부각시키기 위한 암시와 반란의 주체자로 역할을 표현하고 있다. 사실이 아니다.

No.6 Scene에서는 좌익의 폭력성을 강조하고 있다. 동인과 동신이 기독교인이라 해서 끌려 온 것만은 아니다. 당시 우익단체인 학련과 좌익단체인 민애청이 대립되었으며, 순천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동인과 동신은 우익단체인 학련의 간부로 활동 중이었으며, 안재선은 민애청 활동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오랜 반목이 여순사건에서 폭발한 것이다.

최근에 손동희 권사(손양원 목사의 큰 딸, 당시 16세)가 남긴 인터뷰와 저서에는 “당시 좌익과 우익, 서로간의 알력이 극에 달했어요. 같은 반 친구들끼리 칼을 품고 으르렁 거렸습니다”(손동희의 증언, <참평안> 2010년 9월호), “원수갚기에 여념이 없던 우익학생들도 제정신도 잃고 살기등등했다”(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아가페, 1994)고 기록하고 있다.

제2막 No.1 Scene에서는 반군의 지도자 지창수가 “여성인민위원장 송욱 교장은 학생들을 동원하여 반동을 숙청 중이오”라고 말한다. 여기서 송욱은 당시 여수여자중학교 교장이었다. 송욱은 남성으로써 여성인민위원장이라는 직책은 온당하지 않다. 또한 이후 정부 발표와 일부 신문에서 송욱 교장을 여순사건의 ‘민중의 총지휘자’로 발표하였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동인과 동신이 좌익학생에게 억울하게 희생되었듯이, 송욱 교장도 본인과 전혀 무관하게 반란의 주동인물로 체포되어 처형됐다. 그도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 확인 없이 송욱 교장이 학생을 동원하여 반동을 숙청하는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큰 왜곡이며, 억울하게 죽은 송욱 교장에 대한 모독이다. 송욱 교장의 등장은 제14연대 국군의 반란을 전남동부지역의 민간인으로 반란의 주체를 호도하기 위해서 정부에서 발표했던 것이다.

▲ ‘오페라 손양원’포스터
No.4 Scene에서는 좌익들이 기독교인만을 마치 처형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반군이 지방좌익과 함께 우익인사를 처형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만 처형한 것처럼 묘사한 것은 잘못됐다. 당시 목사 신분으로 처형된 사례가 순천에서 있었는지 사실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또한 동인의 뛰어난 음악 실력을 인정하면서 가르쳤던 순천사범학교 교사 오경심도 공산주의자였다. 즉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무조건 기독교인을 배타적으로 억압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경심과 동인의 관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No.8 Scene은 안재선이 동인과 동신을 죽였다고 취조하는 장면이다. 대본에서도 “안재선은 그가 동신과 동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손동희의 저서에서도 안재선이 동인과 동신을 죽였다는 내용은 없다. 다만 동신이 총살되고 확인사살을 안재선이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안용준이 쓴 <사랑의 원자탄>에서도 동인과 동신을 세워놓고 5명 학생이 총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총에 누가 죽었는지는 애매모호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안재선이 동인과 동신을 죽였다고 된 것일까?

손양원 목사는 승주교회 나덕환 목사를 통해 두 아들을 죽인 학생을 살려서 양자로 삼고자 한다며 주선을 요청했다. 안재선은 그가 죽였음을 극구 부인했다. 그런데 나덕환 목사와 동생 손동희의 말을 들어보면, 동인과 동신을 죽였다고 한 사람은 살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안재선은 동신을 확인 사살했다고 자백하면서, 동인과 동신을 죽인 사람이 됐다. 그리고 살아났다. 나머지 사선에 섰던 4명의 학생들은 끌려가 총살됐다. 즉 동인과 동신을 죽였다고 자백한 안재선은 살아났으며, 안 죽였다고 버틴 4명의 학생은 총살됐다.

‘오페라 손양원’의 대본 작성자 김희보는 대본의 맨 마지막에 “여수 반란 사건 때(1948. 10. 21) 손동인, 동신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드리심을…”이라고 적고 있다. ‘오페라 손양원’의 소개 책자 처음에는 ‘사랑의 원자탄 민족지도자 손양원 목사’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이태훈 문화부 기자의 글이 실려 있다. 이태훈은 여기서 1948년 ‘여수․순천반란사건’이라고 칭하고 있다.

1948년 반란의 주체는 ‘국군 제14연대’ 군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도 초기에는 ‘국군 제14연대 반란’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왜 ‘여수반란사건’, ‘여순반란사건’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까? ‘반란’을 군인이 일으켰다고 하기에는 그 책임성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그래서 여수․순천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정부는 발표하고 언론은 대서특필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바로 송욱 교장이다. 그리고 전남동부지역에서는 대대적인 부역자 색출로 인하여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됐다.

‘오페라 손양원’은 우리지역의 역사를 알게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사실 확인없이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부분은 반드시 수정되어 여수 공연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면 관계로 자세하게 싣지 못했다. 전문은 [http://blog.daum.net/kor0301]에서 확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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