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길 30

피아니스트 윤효간 초청 콘서트가 열렸다. <피아노와 이빨>이라는 도발적인 문구 그대로, 피아노를 치면서 ‘이빨을 까는’ 콘서트여서 아이들의 반응이 괜찮았다.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이어지는 피아노 연주에서도 풍부한 그만의 표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메시지는 ‘이빨’에 있었다.

“크게 치라는 데서 작게 치고, 작게 치라는 데서 크게 치면 안 되나요?” 악보대로 연주하라고 가르치는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어 콘서트라는 형식을 빌려 스스로 답변하고 있었다. 누구나 걷는 길을 버리고 ‘나만의 베토벤’을 찾아 헤맨 삶이 선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피아노 건반에서 내는 소리가 다 똑같아요. 마치 한 사람이 치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항변하던 소년은 급기야 가출까지 하며 그만의 세상을 만들어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악보와 반대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삶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알아 버려서일까, 듣고 있으면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학생들을 대할 때 제일 나쁜 건 차별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진로 지도를 할 때면, 나는 차별을 한다. ‘먹는 문제’를 가볍게 여기고 ‘꿈’을 좇는 아이를 만나면, 안타깝다. 강요된 꿈은 악몽이지만, 허황한 꿈도 악몽이다. 이런 말 저런 말로 설득하다가, 막판에 가면 거칠게 묻는다. “아빠 부자야?”

그런데도 제 갈 길을 간 아이가 있다. 성적이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품행이 단정하였다. 아들 있으면 며느리 삼고 싶다고 할 정도로 참했다. 아랍어과를 마친 뒤 중동으로 가서 봉사의 삶을 살겠단다. 어떻게 얻은 점수인데. 아까웠다. 강하게 붙잡았다. 하지만, 아이는 끝내 생각을 접지 않았다.

그러던 아이가 얼마 전에 친구와 함께 찾아왔다. 아, 몇 년 만인가. 셋이서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하지만 꿈이 머물다 간 자리는 쓸쓸했다. 아이가 그랬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고운 마음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지만, 현실은 엄혹했다.

그런데 그 해, 한 아이에게는 전혀 다르게 대했다. 그 애도 꿈을 꾸고 있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등을 도닥여 주었다. 차별한 거다. 왜냐고? 아빠가 부자였기 때문. 자신의 노동을 헐값에 팔지 않아도 되면, 무엇을 하면 안 되리. 일생 동안 꿈을 꾸어도 되는 아이가 부럽기까지 했다.

윤효간은 옳았다. 다르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다 옳은 건 아니다. ‘UN성냥’ 집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이 세상에는 더 많기 때문. 책을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별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도 되는 세상이 모든 아이들 앞에 펼쳐지면, 얼마나 좋으랴.

대단한 삶을 두고도
평범한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용기이지만,
자기만의 뽀송뽀송한 방 하나 마련해 두지 못하고
삶을 거칠게 다루는 것은 만용이다.
빛은 입자이지만 파동이기도 하다.
-‘빛은 입자이지만 파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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