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길 33

겨 나간 지붕은 이제 예전의 날렵함을 되찾았지만, 교정에는 아직도 그 날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볼라벤이 송두리째 뽑아 버린 은행나무와 덴빈이 무너뜨려 버린 히말라야시다의 밑동을 보면, 자연의 분노라는 말이 실감난다.

나무는 걸을 수 없기에 꽃을 피워서 나비를 부르고 열매를 맺어서 새를 부른다고 한다. 그 나무들도 그랬다. 발 달린 짐승들이 다 떠나도 그 어디도 가지 않고 늘 여전한 모습으로 교정을 지켜 주었다. 그러며 스스로 만든 그늘에 아이들을 불러들여 추억을 가꾸게도 해 주었다. 그러던 나무들이 갔다.

알 것이다, 은행나무. 요놈은 신기하게도 암수가 따로 있다. 가지가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수나무에 비해 암나무는 대지를 감싸듯 퍼져 있다. 모양까지도 영락없이 사람이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그 나무가 처참하게 꺾여 나갔다. 30년 넘게 거기 머물던, 푸른 여름과 노란 가을과 하얀 겨울도 함께 꺾였다.

그런데 며칠 뒤 몰아닥친 태풍은 식당 앞에 있는 히말라야시다를 다시 때렸다. 잎을 갈지 않는다고 ‘개잎갈나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까지 가지고 있는 그 나무는 더 이상 상록교목이 아니었다. 솔로몬이 성전을 세울 때 바친 백향목이 바로 이 히말라야시다라던데, 그 영광조차 쓰러져 버렸다.

그 모진 여름이 가고, 가을 건너 겨울이 왔다. 나무마다 하나씩의 나이테를 만들며 천천히 한 해를 되새기고 있을 때,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는 고놈들은 말라 가고 있었다. 그런데 교정의 다른 나무들은 태풍에도 끄떡없다는 사실이 번쩍, 눈에 들어왔다. 태풍 때문이라고만 여겼는데,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태풍에 꺾인 나무들은 하나같이 막혀 있었다. 은행나무는 건물 틈바구니에서, 히말라야시다는 한 평도 안 되는 비좁은 땅에 갇혀 있었다. 피곤할 곤(困)! 사방이 벽인 구(口)라는 글자 안에 나무[木]를 뜻하는 글자가 거기에 써져 있었다. 발 달린 짐승들이 그런 글자를 써놓은 것이었다.

문학을 가르치다 보면, 은자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은자는 단순히 세상 꼴이 보기 싫어 은거한 게 아니라, 천지의 기운이 막힌 것을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 피한 경우가 많다. 그 나무들도, 사방이 막히고 시절까지 험해지자 그렇게 몸을 피한 은자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가 아름다운 건, 오래 된 추억이 곰삭고 있는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실에도 추억이 있고 화장실에도 추억이 있다. 하지만 나무에 얽힌 추억과는 격조가 다르다.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하늘을 쳐다보며 나눈 대화에는 늘 바람처럼 음악이 흐르게 마련. …세밑, 나무 두 그루를 삼가 보낸다.

하늘과 땅이 뻥 뚫려 있으면 나무가 무성하지만
하늘과 땅이 꽉 막혀 있으면 어진 이가 숨는다.
나무는 그 말을 남기고
잎을 새로이 내는 것을 멈추다.
- ‘잎을 새로이 내는 것을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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