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길 39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갔다. 그 동안 하늘은 철 따라 빛과 비를 내리셨고, 땅은 그것을 두 손으로 모시어 고운 생명을 내느라 분주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겨울. 그간 고마웠다. 그간 행복하였다. 그간 참으로 미안하였다. 슬픔은 어느덧 얼어붙어 여기저기 차가운 눈발로 흩날리고 있다.

이 못난 샘하고 일 년을 견뎌 준 내 새끼들아. 처음 만났을 때 너희는 싱싱한 봄이었는데, 그 봄이 내게 다가와 봄처럼 함께 지내자고 말해 주었는데, 미안하다. 아침 됩니다 해놓고 아침도 굶기고, 점심 됩니다 해놓고 점심도 굶기고, 저녁 됩니다 해놓고 저녁마저 굶기면서, 너희를 주리게 하였구나.

어른들이 바라는 대로 바라고, 어른들이 느끼는 대로 느끼고, 어른들이 꿈꾸는 대로 꿈꾸라고 다그쳤구나. 때로는 세상 탓을 하였지만 아니다, 그건 내 탓이다. 이 샘이 그만큼밖에 못 되어서 너희가 피우려는 꽃을, 그 귀한 꿈을, 섬세하게 바라보지도 못하고 천천히 기다려 주지도 못하였구나.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자격도 없다. 그런데도 너희는 지난 여름 세상을 적시는 장대비로 벅차게 다가왔다. 갈색의 근육질 다리로 갈기를 휘날리며 땅을 박차고 달려와 메마른 것들을 적셔 주었다. 하늘과 땅을, 마침내 나까지를 푸르게 물들여 주었다. 그 건강한 젊음을 잊을 수가 없다.

알고 있구나. 그래, 그날이다. 교내체육대회가 열리던 날. 그날 우리 반이,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 축구를 놓치고, 농구 우승을 하였을 때. 야호! 가도 가도 푸른 바다였다. 그런 푸른 느낌 처음이었다. 파도는 산처럼 일렁였고 강처럼 찬란했다. 수묵을 치듯 다시 어둠이 번질 때, 적어도 그때까지는.

몇 차례 시험을 치렀고, 결과가 나왔다. 닦달이 시작되었다. 쓸쓸한 가을이 도둑처럼 다가왔다. 그랬을 거야. 아무 연락도 없이 잠적해 버리고 싶을 만큼 아팠을 거야. 그럴수록 나는 눈을 감았다. 더욱 비장해졌다. 온힘을 다해 빛을 짜내는 석양처럼 그렇게 서 있는 너희를, 다시 쥐어짰다. 용서하라.

산다는 게 뭘까. 아니, 이 땅에서 선생으로 산다는 것이 뭘까. 너희 눈을 감게 하고, 입을 다물게 하고, 생각을 그치게 하는 게 과연 선생일까. 그런 입 냄새 풀풀 풍기는 게 사랑일까. 그런 사랑 지겨워요, 금방이라도 손을 뿌리칠 것 같은 너희를 다시 윽박지르며 붙잡는 게 사랑일까. 사랑일까.

이제 마지막 계절. 눈 내리고 그 위에 눈이 내리고 세상은 다시 얼어붙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겨울 그 속에, 가을이 여름이 봄이 어깨를 겯고 있다. 열망하면서도 절망하며 절망하면서도 갈망하는 게 겨울이라더니, 겨울은 잃어버린 계절을 꼭 안고 있다. 너희처럼. 그것이 나이테다. 부디 잘 살아라.

언젠가 문학 시간에 말했지.
인생은 소설처럼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까닭도 없이 죽고, 느닷없이 사랑하며, 감격처럼 봄을 맞기도 한다고.
그게 혁명이라고. 혁명은 늘 그렇게 겨울에 준비된다고.
그런데 사실 그건, 이 샘 말이 아니다.
오래 전에 창백한 겨울이 내게 들려 준 말이다.
- ‘혁명은 늘 그렇게 겨울에 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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