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 선생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내가 군대 말년에 보안대에 끌려간 적이 있어. 취조를 받다 ‘너 어디서 왔느냐?’ 하기에 여수에서 왔다고 했지. 그러니까 대뜸 ‘이 여수반란 빨갱이 새끼’ 하며 더욱 거칠게 다루는 거야. 마치 내가 간첩인 것처럼. 죽는 줄 알았어. 도대체 여순사건이 무엇이기에 단지 여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나, 살아 나가면 반드시 알아봐야겠다 다짐했지.”

눈썹은 옅고 위로 치켜 올라가 있다. 2대 8 가르마에 뭔가 딱딱해 보이는 인상. 자신을 우리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직업운동가라고 소개하는 사람.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이하 여사연) 이영일 소장을 만났다. 20년 가까이 여순사건 진상규명사업에 몸을 바쳤고, 그날도 서울에서 열린 학술세미나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왜 20대에 했던 자신의 다짐을 50대가 되어서도 지키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영일 소장, 오래된 양복을 입고 나타난 그는 무겁고 가라앉은 말투에 완전 중저음이었다. 여순사건 피해를 말할 때 그의 말투는 더욱 단호하게 변했다. 카리스마에 우리는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 조승완

“여순사건 하면, 여사연 이영일 소장 하던데요?”

- 이영일 소장 하면 여순사건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데 일생을 바친 분이라는 평가가 있던데요?
“아직 다 살진 않았으니까 일생을 바친 건 아니고…. (웃음) 직업운동가란 말 들어 봤어? 우리 사회의 변혁을 꿈꾸며 운동을 직업삼아 하는 사람들을 말하지. 그러고 보니 직업처럼 하는 일이 바로 운동이니, 나도 직업운동가라고 할 수 있겠네. (웃음) 그런데 내가 하는 운동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일이 여순사건 진상규명사업이니까, 그런 평가가 나오는 것 같아. 죽는 날까지 여순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명예회복 사업을 계속할 생각이기도 하고.”

- 여순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소장님께서 일생을 거실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거야. 역사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이어지고 미래로 다시 그 의미가 투영되는 가치 있는 거야. 여순사건은 현대사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이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 영향력이 지금도 강력한데도 불구하고, 묻혀버린 역사야. 진상규명이란 그 과거사를 바로 세우고 바로 알리기 위한 작업이지. 명예회복 또한 그래. 유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여수에서 현재 살고 있는 후손들이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해. 이 일이, 내가 일생을 걸 만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1990년대에 여순사건은 사회적 금기였다고 들었습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당시의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1997년도부터 우리 연구소가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여순사건을 다루기 시작했지. 그때만 해도 여순사건이라 하지 않고 여순반란사건이라 했어. 그런데 여순반란사건이라고 하면 우리 지역 주민들이 반란의 주체라고 오인할 소지가 있어. 그래서 다들 ‘여순사건’이라고 하자고 하여 바꾸었지. 하지만 그렇게 바꿔 놓고도, 여순사건이라는 말조차 마음 놓고 하기 힘겨웠어. 여순사건의 ‘여’자도 꺼내지 못하는 공포 분위기가 깔려 있었거든. 특히 우리 사회의 보수우익단체들은 아주 대놓고 우리를 몰아붙였어. 물론 지금도 반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 현장 조사,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그간 수백 명의 피해 유족들을 찾아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여순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앞장서 왔다. ⓒ 조승완

“여순사건, 과거완료형의 역사가 아니네요?”

교과서에도 언급되지 않은 여순사건. 도대체 뭘까?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았다. “<여순사건>. 언제? 1948년 10월 19일. 어디서? 전남 여수·순천에서. 누가?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무엇을? 반란을. 어떻게? 무장봉기하여. 왜? 제주도 4·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려고.”

그러나 여순사건은 그렇게 몇 줄로 줄이기에는 너무 아픈 역사였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서희종 상임연구원을 만났다. 도대체 얼마나 희생되었는지부터 물어 보았다. 수만 명이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순사건은 10월 19일 발발하여 공식적으로는 10월 27일 진압되었는데, 진압 이후에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란다. 주민들을 운동장이나 진남관 등 공터에 불러놓고 한 명 한 명 분류하여 죽이거나 어디론가 끌고 갔다는 것이다. 설명을 들으며 가슴이 내내 먹먹해졌다.

- 소장님, 서희종 연구원님에게서 여순사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여순사건이 과거사에 지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남북대립이 60년이 넘게 계속되는 상황에서, 여순사건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여순사건은 단독정부, 단독선거 반대 운동과 관련이 있어. 단독정부, 단독선거 반대는 통일이라는 말과 통하는 바가 있지. 여순사건을 단순한 이념전쟁이나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차원을 넘어 통일운동으로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 아울러 여순사건은 국가폭력이라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국가가, 마땅히 지켜야 할 절차도 무시하고 국민의 생명과 자산을 앗아간 것은 폭력이야. 법치 국가에서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위법이 아니라 무법이지. 국가가 자국 국민을 그렇게 죽인 것은 범죄 행위야.”

- 여순사건을 연구하고 현장을 직접 뛰어다니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우리 연구소 연구원하고 순천 근방에 가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 그런데 인터뷰하다 보니 국군도 나오고, 빨치산도 나오고, 피해자인 민간인도 나오고 그랬지. 그런데 이야기가 무르익고 있는데 연구원 한 사람이 ‘어, 우리 편인데!’ 하고 말해 버린 거야. 그러니까 인터뷰하던 다른 쪽 유족이 순간 입을 닫아버렸어. 증언을 안 하겠다는 거야. 무척 당황했어. 우리가 잘못한 거지. 우리 편이 어디가 있고 너희 편이 어디가 있겠어. 너도 우리고 나도 우리고 다 우린데. 남도 우리고 북도 우리고 다 우린데, 우리 편이라니? 이런 웃지 못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우리는 자료집을 많이도 생산해 냈어. 상당한 데이터도 구축하고 있고.”

▲ 이영일 소장과 인터뷰, 여순사건 현장 조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여사연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소장님의 농담에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 조승완

“여순사건 판 ‘지슬’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 제주 4·3사건을 다룬 ‘지슬’을 보니 눈물 나데요. 그래서 말인데, 학술심포지엄 같은 행사도 필요하겠지만, 여순사건을 알리는 데는 영화나 연극 같은 문화 콘텐츠 제작도 중요할 것 같아요. 예정된 게 있으신지?
“없음. (웃음) 우리 연구소의 역량 한계지. 음악, 미술, 영화, 연극 이런 예술 장르. 좀 더 대중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매체가 개발되어 여순사건을 알렸으면 좋겠어. ‘지슬’만 해도 그래. 영화 하나의 사회적 영향력은 대단하지. 4·3을 둘러싼 제주도민들의 끊임없는 투쟁과 요구에 힘입어 영화 ‘지슬’이 만들어졌지만, 여기에 큰 힘을 실어 준 게 있어. 특별법 제정이야. 4·3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니까 사람들이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영화 작업을 한 거야. 여순사건 관련 특별법도 하루빨리 제정되었으면 좋겠어.”

- 여수에 살면서도 여순사건 자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안타까웠지요.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연구소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에는 무엇이 있나요?
“우선 유족회 조직 사업이 있어. 여순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은 있는데 그 유족들이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않아서 단결된 대오를 형성하기 힘들어. 그래서 우리 연구소에서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사업이지. 그리고 매년 10월 19일에 거르지 않고 하는 위령제도 중요한 사업이고. 아울러 구술 증언을 토대로 한 연구자들의 보고서 제작 활동과 학술 심포지엄 조직도 꾸준히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야.”

- 참, 서희종 연구원과 인터뷰하면서 들은 말인데, 여순사건을 놓고 허영만 선생님과 의미 있는 논의가 있었다던데요. 그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그것은 나도 전해만 들었어. ‘식객’의 저자 허영만 선생님과 우리 연구소 창립 멤버이신 김병호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사실이야. 여순사건을 책으로 출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접촉이었지. 하지만 구체적으로 진척된 것은 없어. 만약 허영만 선생님이 이 일을 해 주신다면 연구소가 지금까지 10여 년 이상 해온 작업보다 훨씬 큰 파급력을 가질 거야. 만화라는 대중 매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그분이 만약 의지를 가지고 동참해 주신다면, 연구소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해 드릴 용의가 있어. (웃음)”

▲ 일주명창, 여사연 연구의 불빛이 온 창을 밝혀 여수를 비추인다. ⓒ 김여옥

인터뷰를 마치고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글자를 발견했다. ‘일주명창’. 연구소의 불빛이 온 창을 밝혀 여수를 밝게 비추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한자성어였다. 연구소에 꽂혀있던 수많은 자료집과 연구보고서들만 보아도 20년 동안 여사연이 여수를 위해, 이 땅의 역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이영일 소장님이 우리를 붙잡았다. “허영만 화백이 이 일을 해 주시면 참 좋지. 경고한 장벽이 무너져 내릴 테니까. 그분이 여순사건을 만화로 다루어 주신다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며 소장님은 우리에게 허영만 선생님과 연락이 닿는다면 간곡히 부탁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여수를 배경으로 한 ‘1박 2일-여수 식객 레이스’라는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뵌 게 전부인 우리로서는 난감했다. 하지만 정말 어느 때보다도 간절해 보인 소장님의 목소리에, 우리는 그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우리는 “허영만 선생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쓰고 있다. “허영만 선생님,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 여순사건을 만화로 꼭 그려 주세요.”

(기사 작성 : 동아리 <사랑해여수> 박성경, 김서진, 오세영, 조승완, 김여옥 기자. 지도 교사 : 박용성)

취재 후기 : <사랑해여수>는 “아름다운 여수,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우리 고장을 널리 알리고 있는 여수지역 고등학생들의 연합동아리입니다. 우리 동아리에는 여수(YEOSU)의 글자 하나씩을 따서 만든 ‘Y-fine’, ‘Energy’, ‘Oasis’, ‘Superstar’, ‘U&I’ 총 다섯 팀이 있는데, 이 기사는 E팀에서 작성하였습니다. 기사를 쓰기 위해 5월 11일, 15월, 18일, 세 차례에 걸쳐 여수지역사회연구소를 찾았습니다. 바쁜 시간을 내 주신 이영일 소장님, 두 번이나 저희를 만나 주신 서희종 연구원님, 기사를 쓰면서 저희를 이끌어 주신 박용성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팀장 : 박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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