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여수고등학교 교사

돌아온 고향은 고향이 아니었다. 큰방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는 바람에, 때가 되어도 식구들과 밥 한 끼 먹기 힘들었다. 낮이면 일꾼을 따라다니다가, 해가 지면 소죽 쓰는 뒷방에 몸을 누였다. 한밤중, 눈을 떠 보면 워낭소리만 절그렁거릴 뿐 천지는 적막했다. 그런 날에는 숨죽여 벌레처럼 울었다.

이듬해 봄. 동네 친구들은 읍내 농고생이 되었다. 몹시 부러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했다. 내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고, 나와 말 한 마디 섞지 않았다. 가끔 어머니가 운을 떼 보았지만 모진 말씀으로 상처만 깊어질 뿐. 지상에서 누구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다시 끝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새벽도 혼자서 집을 빠져 나왔다. 딱히 어디 가겠다는 생각도 없이 무작정 나섰다. 그런데 저 멀리서 종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홀리듯 그것에 이끌렸다. 소리 쪽을 향해 걸었다. 먹밤을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갔을까. 예전에 다니던 초등학교 근처에, 종각이 딸린 작은 교회가 나타났다.

마천교회. 낯선 풍경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가 본 곳. 마룻바닥에 털썩 앉았더니, 누가 방석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그 새벽, 왜 그리도 눈물이 났던지. 방석이 젖도록 울었다.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고향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 놓고 소리 내어 울었다. 다음날부터 새벽마다 그렇게 울다 왔다.

눈만 뜨면 아무 때나 달려갔다. 어떤 날은 새벽 두 시에 도착해 그냥 잠들기도 했다. 그러고 있으면 나이 든 권사님이 방석으로 이불을 만들어 덮어 주었다. 신의 손길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따스한 생각이 스쳤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찾은 그곳에서 그 너머의 세계를 문득 느꼈다.

전도사님의 설득으로, 결국, 면 소재지에 있는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받았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그런데 2년 동안 학교 다닌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기에, 다녔던 중학교를 찾았다. 하지만 교무주임은 날 따로 부르더니 뭘 달랬다. 그래야 서류를 떼어 준다는 것.

2학년 때 담임이 와서 거들어 보았으나 쳐다도 보지 않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매달렸다. 그런데 그때 누가 오셨다. 교장 선생님이셨다. 초여름인데 동복 차림의 아이가 눈에 띄었나 보다. 자초지종을 듣고 성적을 들여다보시더니, 혼잣말처럼 그러셨다. “이 정도면 경기고도 가겠는데.”

그러고서 나를 불러 세우더니 물으셨다. “열심히 공부할 거야?” 예? 옛! 나는 죽어라 대답했다. 그러자, 엉거주춤 서 있던 교무한테 “복학시켜.” 그러시는 거였다. “퇴학 처리되었는데요?” 교무의 이 말에 거구의 교장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는가. “휴학한 걸로 고쳐!” 기적은 그렇게 도적처럼 다가왔다.

좋은 것이 떠올랐는데도
염치없어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그분은 나를 위해 더없이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지쳐 쓰러져 있던 바로 그 길목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인간의 옷을 입고 그분은 늘 내게 그렇게 오셨다.
- 인간의 옷을 입고 그분은 늘 내게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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