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여수고등학교 교사

고등학교에 가서 만난 건, 책과 친구였다. 책은 외로워서 만났고, 친구는 쓸쓸해서 만났다. 책은 나에게 외로움의 깊이를 들여다보게 해 주었고, 친구는 내게 쓸쓸한 노래를 같이 부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1970년대의 음울한 시절을 그렇게 견디며 우리는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훌쩍 건너갔다.

돌이켜보면 도스토옙스키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세로로 이단 편집된 두꺼운 책 앞에서, 나는 너무 버릇없이 들이댔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그놈의 러시아 이름이 어찌나 길든지 공책에 일일이 가계도를 만들어 가며 읽지 않으면 내용은커녕 도대체 누가 누군지도 모르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읽었다.

문학적 감동이 커서? 아니. 예술적 열정에 매료되어서? 아니. 나를 보라. 내가 그런 사람이었겠는가. 그건 순전히 치기로 시작되었다. 열람실에서 책을 읽는데, 도서관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그러셨다. 최태정 선생님이셨다. “그 책 어려울 텐데.” 막 도로 꽂아 놓으려던 참이었는데, 암, 그럴 수야 없지!

주야장천 도스토옙스키만 읽었다. 그 책의 두께를 보고 조금은 놀라는 듯한 주위 시선을 즐기며 스스로도 흐뭇해하였다. 얼치기였던 셈. 그런데 문제는, 책에 대해 묻는 놈들 때문에 커졌다. “그게 뭐야?” 그때 나는 이랬어야 했다.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어떻게 알아, 얀마.” 그러고 끝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죄와 벌’을 세 번쯤 읽고 나니 라스콜니코프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전당포 주인을 죽이고 소냐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내용이 끝없는 자기 합리화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위로받지 않으면 안 되는 그가 몹시 안쓰러웠다. 그에게서 나를 보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죄와 벌’과는 달리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읽고 싶어 읽었다. 빠지다 보니 도스토옙스키가 왠지 마음을 끌어당겼다. 인간 영혼을 묘파하는 그의 통찰 앞에, 사람이 이리 위대할 수 있겠구나 경탄했다. 보이지 않은 세계를 보이는 세계보다 더 실감나게 보여준 그는, 리얼리스트였다.

그의 소설 ‘카형’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문제적 주인공들이, 처음에는 각기 다른 캐릭터인지 알았다. 하지만 읽으면서 그건 한 사람의 다른 내면임을 깨달았다. 탐욕스러우면서도 고결하기를 동경하는 존재,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도 무신론의 의심에 몸을 맡기고 사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 그걸 느꼈다.

나중에 선생이 돼서 논술이라는 것을 가르치는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제시문으로 하는 어느 대학 논술 문제를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가. 나는 그때 그 시절을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샘이 그리 흥분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는 아이들 말을 듣고 애써 자제하였지만, 그 감격은 지금도 누르기 힘들다.

무릇 인간이란
하느님의 가없는 사랑을 소진시킬 정도로 큰 죄를 범할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을 능가할 만한 죄가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 그때까지 날마다 스스로를 응징하고 있던 나였기에
조시마 장로가 여인에게 들려 준 그 말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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