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여수고등학교 교사

신에게 매달렸다. 소멸이라는 존재의 파국에 부닥쳐 본 뒤로, 사는 게 두려웠다. 사람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신을 찾는다지만, 그때 나는 죽음보다 훨씬 두려운 게 삶이었다. 삶의 외로움을 그나마 달래줄 수 있는 건 종교적인 믿음과 영적인 연대밖에 없다고 그때 생각했다. 교회는 그것을 내게 주었다.

비록 ‘지금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도 그것만이 다는 아니라고, ‘저 너머’에는 영원으로 이어지는 참된 기쁨이 있다고 교회는 가르쳤고, 나는 아멘으로 화답했다. 무속적인 뜨거움이라 비아냥대는 친구도 있었지만 부흥회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다 ‘엑스플로 74’라는 대규모 종교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1974년 8월 12일, 서울행 야간열차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비좁았다. 한증막이 따로 없었는데, 신문지에 누워 쪽잠을 청하면서도 기뻤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오랜 숙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해답을 찾게 해 주소서, 간절히 구했다. 처음 보는 광장은 신의 품처럼 넓었다.

며칠 동안 모든 걸 맡겼다. 여의도광장에 친 대형천막에서 지내는 거친 일상에 지루한 장마까지 겹쳤지만, 통과의례로 여겼다.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것만도 감격이었다. 비오는 그 밤, 그 비를 맞으며 울먹였다. 마지막 밤에는 백만이 넘게 모인 무리와 함께, 휴거되고 싶었다.

어쩌자고 그랬을까, 감히 목회자의 길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달뜬 감정. 신은 그 가벼운 감정을 아주 가볍게 눌러 주셨다. 한 교회에서 두 목사가 등을 지고 예배하는 광경을 보여 주신 것. 그것도 각목으로 무장한 채. 그곳도 세상과 다를 바 없었다. 데칼코마니였다. 혼돈은 깊고 절망은 컸다.

그래도 그곳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그때 나는 많이 무너졌다. 새찬송가를 부르는 교회를 떠나 합동찬송가를 부르는 교회로 옮겼다. 그 해 겨울, 무등산 제일기도원에 가서 눈 쌓인 산하를 바라보며 매달려도 보았다. 하지만 욕망의 뒤끝처럼 허망했다. 그뿐이었다.

1980년 8월 6일, 나는 그 욕망과 결별했다. 심하게 망가진 채 갇혀 있던 나를, 군인들이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다 앉혔다.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 그 화면에 한경직 목사님이 보였다. 하지만 탄성도 잠깐. 그분은 전두환 장군님께서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셨지만, 그분이 기도하는 그 나라에는 내가 포함되지 않음을 그때 알았다. 목회자는 신의 음성이 담긴 도구라고 여겼는데, 그분마저 신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이들과 다르지 않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 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신이 나를 부르기까지 나는 오랫동안 유리걸식하였다.

꽃이었으니까 지고 꽃이었으니까 다시 피겠지만
정작 꽃을 지게 하고 피게 하는 건 무엇일까.
눈물에 먹을 갈아 고쳐 그리기를 몇 번,
그분은 날마다 나를 지워가며 다시 그리고 계실 텐데
맨 나중 나의 모습이 어떠할까 궁금해지면 그때마다 나는
길가에 피어 있는 작은 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곤 했다.
- 나를 지우고 다시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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