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여수고등학교 교사

주변에 어른이 계신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그 앞에 가면 고개를 숙일 수 있고, 왠지 앞으로 지나가기도 어렵게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가까이 가고 싶고, 그러다 꾸중이라도 내리시면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무치는 말씀이 되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그런 어른이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그맘때 들여다보는 어른의 세계는 참으로 아니게 마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뿐, 닮고 싶은 분을 찾기 어렵다. 그렇게 대단하던 아버지조차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어머니도 더 이상 그 품이 아늑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바로 그 무렵.

그런데 그때 우리는 교정에서 귀한 어른을 만났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앙이었던 우리 학교에는 기념탑이 있었는데, 틈만 나면 우리는 탑 앞에서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였다. 그러노라면 역사의 격랑을 벅차게 건너온 그분들이, 길을 찾고 있던 우리를 아들처럼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아들. 이름이 왜 그랬는지 모른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도 가물거린다. 어쨌든 우리는 한 친구가 만든 유인물을 돌려 읽으며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나 골골샅샅으로 퍼져 나간 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했고, 기념탑 경내에 세워진 송홍 선생의 동상 앞에 까닭도 모른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선홍빛 감정을 공유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때까지와는 다르게 살 수 있겠다는 설렘이었을까. 어제를 통해 오늘을 바라보며 내일을 당겨 사는 역사적인 삶을 우리도 살 수 있겠다는 기대였을까. 안개꽃처럼 아득하였지만, 그건 생각만으로도 찬란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차마 입에 올리기도 힘겨운 탑문조차 그땐 거침없이 외웠고, 함성을 지르며 곧 튀어나올 것 같은 부조를 어루만지며 그분들과 하나 되는 서늘함도 체험했다.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였겠지. 세상 무서운지 몰라서 그랬겠지.

지금은 비록 가슴에 지갑만 품고 다니는 선생이 되어 자유니 정의니 감히 떠올리기조차 민망하지만, 그래도 가슴 한 편에 부끄러움이라도 간직하고 사는 건 그분들 덕이다. 봄의 첫날인데도 가을 끝자락만 떠올리던 나는, 겨울 복판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지혜를 벗들과 함께 배우며 날마다 향기로웠다.

사람은 하루살이가 아니라 여러해살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그랬다지. 지난 수천 년 역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 뿐이라고. 그때 그 괴테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분들은 내게 요한이었고 볼프강이었고 폰이었고 괴테였다. 오랜 적막을 깨뜨려 준.

만지고 싶고 부비고 싶고 껴안고 싶고
바라만 보아도 웃음꽃이 절로 피는
그런 연인이 시간에도 있다면,
그때 그 시절이 바로
내게는 연인이다.
- 시간에도 연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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