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여수고등학교 교사

어떻게 잊겠는가. 1975년 5월 14일, 제9회 대통령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 열리던 날. 비 때문에 하루 연기된 경기가, 고마우셔라, 하늘도 구름을 밀어내고 사뭇 쾌청. 어둠이 깔리며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친구들은 벌써 버스를 대절해 서울로 떠났고, 남은 우리는 발만 동동 굴렀다.

0대 0으로 팽팽하게 맞서던 상황. 지루한 균형을 깬 건 5회 초, 4번 타자 김윤환이었다. 왼쪽 담장을 훌쩍 넘기는 홈런을 날린 것이다. 그러고 6회와 8회, 그는 두 번째 세 번째 홈런을 쏘아 올리며 한반도의 밤하늘을 섬광으로 물들였다. 고교야구 사상 초유의 3타석 연속 홈런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결과는 6대 2. 전년도에 대통령배와 청룡기를 석권한 야구 명문 경북고를 누르고, 우리 학교가 패권을 차지한 것이다. 그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26년 만의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감격에도 살이 떨렸지만, 그날 밤 서울운동장에서 괴물로 탄생한 김윤환에게 모두들 빙의된 느낌이었다. 날뛰며 환호했다.

광주는 발칵 뒤집혔다. 충장로에서는 스크럼 행렬이 이어졌고, 우리도 떼로 몰려다니다 우체국 앞에서 만난 공업 선생님을 헹가래 치기도 하였다. 다음다음날, 군용 지프에 나눠 탄 그들을 광주는 개선장군으로 맞이하였다. 시민들의 갈채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이후 우리 학교는 체육고등학교가 되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야구 이야기만 했다. 우리는 중계방송을 녹음해 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틀었다. 학교에서도 점심시간이면 “홈런이냐? 홈런이냐? 홈런이냐? 예, 홈런입니다!” 하는 아나운서의 달뜬 목소리를 질리도록 들었고, 수학여행 내내 그걸 틀어 댔다. 그러며 낄낄거렸다. 마냥 행복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무서운 환각이었다. 마지막 학생 시위였던 4․30 거사가 실패하는 바람에 학우 16명이 제적되던 그날도 우리는 야구 이야기만 했고, 같은 반 친구가 주모자로 몰려 광주교도소에 수감되던 그날도 우리는 야구 이야기만 했다. 아주 가끔, 환희가 부끄러웠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봄은 그렇게 갔고, 서늘한 가을이 다가와 동토의 계절을 알렸다. 우리는 걸핏하면 반공궐기대회에 동원되었고, 교련검열 때문에 오후 수업을 몇 달씩 반납해야 했다. 하필이면 결승 하루 전날 유신에 대한 단순 비판도 사형에 처한다는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었지만, 아무도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다.

“우러러 보아라”로 시작되는 응원가만 나오면 우리는 용수철처럼 튕겨 올라 “플레이 일고 플레이 일고 플레이 플레이 플레이”로 화답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지도 못했고, “창공 나는 독수리”도 “포효하는 범”도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포획된 것이다.

스포츠야말로 우리네 삶에서 드물게 진실하다고
목이 터져라 우리는 응원가를 불렀고
견고한 어깨동무로 하나가 되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이고
기적은 기적일 뿐이었는데
… 그것은 너무 밝아 우리를 눈멀게 했다.
- 그것은 너무 밝아 우리를 눈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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