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여수고등학교 교사

고등학교 3년 동안 한 대도 맞지 않고 졸업했다고 하면, 그런다들. “모범생이었나 보네요.” 본받아 배울 만한 본보기를 ‘모범’이라 한다면, 나는 그런 낱말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주어진 길을 따라 다소곳하게 걸어본 적이 별로 없다. 심하게 한눈팔기도 했고, 그 길을 아주 벗어났다 돌아오기도 했다.

입학식은 새롭게 출발한다며 다들 단정하게 하고 나타난다.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런데 첫날부터 머리털 덥수룩한 머털도사 하나가 교실에 앉아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십중팔구 담임한테 한소리 듣거나 얻어맞는다. 나도 그럴지 알았다. 그런데 서하석 선생님은 그런 꼬락서니를 보고도 웃으셨다.

그런데 며칠 뒤, 학교는 두발 자율화를 발표한다. 까까머리에서 스포츠머리로 바뀐 건 아마 우리 학교가 최초였지 싶다. 그런데 그 상큼한 스타일이 가능한 이는 나밖에 없었다. 다들 머리를 빡빡 밀었기 때문에 적어도 한 달은 기다려야 했다. 이튿날 머리를 다듬고 나타났을 때, 친구들은 우와 했다.

그때가 70년대 아니었나. 한번은 학생시위에 낀 적이 있다. 별것 아니고, 집결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급우들에게 “나가자!” 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불려가 이런저런 조사를 집요하게 받았다. 원 참, 반책이었다나? 등교정지 처분. 잘됐다 싶어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 자취방에 박혀 살았다.

가끔 담임이 오셨다. 어느 날은 교련 선생님과 함께 오시기도 했고, 책을 들고 오시기도 했다. 오셔서는 말없이 앉아 계시다가 말없이 가셨다. 아, 가시면서 이 말씀은 하셨지. “밥 잘 먹어.” 그러다 다시 학교에 나갔는데, 아무도 때리지도 무릎 꿇리지도 않았다. 그 흔한 반성문 한 장 요구하지 않았다.

공부? 처음에는 잘한다며 무슨 배지를 주기도 하던데, 더 재미있는 게 많았다. 그래서 이따금 생각나면 했다. 대신 이상한 책을 읽고, 이상한 세계를 기웃거리고, 이상한 선배를 만났다. 그것도 싫증나면 방학을 기다렸다 아무 데나 가서 며칠씩 있다 돌아오곤 했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그렇게 보냈다.

아무도 때리지 않았다. 학교를 빠져도, 백지 답안지를 내도, 딴 책을 읽어도. 아니다, 딱 한 대 맞긴 했다. 미적분이었을 것이다. 물으러 간 적이 있다. 명쾌하게 설명해 주시더니, 선생님은 머리를 쥐어박으며 이러셨다. “앞으로 모르면 과외 받으러 와.” 그게 그렇게 아팠다. 그때 집이 좀 어려웠거든.

옥에도 티는 있는 법. 그래서 모두 고맙다. 나를 끝까지 무겁게 대하며 자존감을 지켜 준 분들. 내게는 은사들이시다. 탯줄은 제때 산뜻하게 잘라야 한다지만 나는 아직도 그분들에게 이어진 가느다란 끈을 자르지 못한다. 선생 노릇을 하면서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그분들은 여전히 내게 젖줄이시다.

졸업을 앞두고 한 친구가 물었다.
선생님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잠깐 먼 산을 보시더니 선생님께서 대답하셨다.
그것은 포기다,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아는 것.
연세 드셔서 그러려니, 가벼이 넘겼다.
그런데 어느덧 그 나이가 되어 아이들 앞에 서다 보니
그 말씀이 젖줄이 되어 가끔 내 어깨를 다독인다.
- 그분들은 여전히 내게 젖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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