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여수고등학교 교사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 생명은 숨 쉬고 있었다. 5월, 그 모진 세월을 뚫고 풀잎은 돋아났고, 어미소나무가 불탄 자리에 애솔은 자라고 있었다. 어찌 견뎠을까 교목인 느티나무도 아름드리 그대로였고, 빠지면 에이즈 빼고 모든 병에 다 걸린다던 용지도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추억처럼 빛나고 있었다.

험한 세상에 무르춤하여 다시 시작해도 될까 망설이던 내게, 양혜단 이미지 문미정 박명섭 김장홍 채종민 김형호, 그들은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사과 속의 씨는 누구나 알지만 씨 속의 사과는 하늘만 안다더니, 그 작은 씨앗들이 어찌 그렇게 신비로운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지 그때는 몰랐다.

먹잇감을 고르듯 음습하게 노려보는 눈길은 여전했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척박한 현실에 단단히 뿌리내리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았다. 합법 공간에 거처를 마련하기로 한 것. 학과 친구들을 중심으로 학회―스터디그룹을 그때는 학회라 불렀다―를 만들기로 하였다.

드디어 학습은 시작되었다. 내놓고 볼 수 없는 책은 보지 않았다. 대신,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정의라고 하는 미국의 철학자 롤스를 읽고, 해방전후사를 읽고, 후진국경제론를 읽었다. 파블로 네루다와 신경림을 읽고 조세희와 황석영을 읽으며 문학이 주는 사회적 울림에 몸을 맡기기도 하였다.

그 해 10월 12일,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40여 일간의 옥중 단식 끝에 박관현이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지만, 영안실에 가서 수염으로 까칠해진 형 얼굴을 바라보며 살아남겠다고만 다짐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종일 숨만 쉬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손길이 되었다.

그러다 가끔 5월의 발화점인 정문에 가서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고, 5월의 끝이자 시작인 망월동에 가서 가슴에 소주를 붓고 돌아오기도 했다. 교정에 단정하게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돈하기도 했고, 그래도 가슴이 헛헛해지면 무등산에 올라 땀에 흠뻑 젖어 돌아오기도 했다.

솔직하다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성실하다는 것은 그 진실을 실천하는 것인데, 나는 진실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살아남아 졸업이라는 것을 했고, 꽃샘잎샘바람이 휘몰아치던 어느 해 봄 여수에 와서 국어 선생이 되었고, 곡절은 있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나는 평생 그럭저럭 살아온 교사에 지나지 않지만, 아직도 교단에 서면 왠지 빛나는 느낌이 든다. 이런 착각에 빠져 살아도 되나 싶어 전화했더니, “아냐, 형 판단이 옳았어.” 후배이지만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은 혜단이가 예전의 따뜻한 손을 다시 내밀어 주었다. 그 손 덥석 잡아도 될까 모르겠다.

교회 담벼락에서 담쟁이를 처음 보았을 때
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가는 푸른 사다리로 보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교회를 찾아 찬찬히 바라보니
아, 그것이 담쟁이의 뿌리내리기라는 것을 알았다.
담쟁이의 땅은 하늘이라는 것을 알았다.
- 담쟁이의 땅은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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