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빈 변호사/조선대학교 석좌교수

▲ 김종빈 변호사/조선대학교 석좌교수.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도는 1948년 7월 17일 제정 공포된 제헌 헌법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지방자치제도의 도입 근거가 마련되었고, 1949년 7월 4일로 지방자치법(법률 제32호)이 제정됨으로써 지방의회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 6·25 동란으로 지방의회 구성이 지연되다가 1952년에 첫 지방선거가 실시되었고 1961년 5·16혁명까지 9년간 3대에 걸친 지방의회가 구성된 바 있다. 제3대 지방의회가 문을 연지 5달 만에 5·16혁명으로 문을 닫고 30년간이나 겨울잠을 자다가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91년에 제4대 지방의회가 구성되었고 현재까지 제7대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지방의회의 기능과 권한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오늘날에는 민주주의의 근간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지방자치제도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지방의회 선거와 관련된 나의 어릴 적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 그 시대의 한 단면과 오늘의 세태를 비교하면서 하나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되니 아마도 1956년도에 있었던 지방의회 선거 때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당시 면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마침 우리 마을 이장하시던 분이 면의원 후보에 나섰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밤낮으로 면의원 후보자의 이름을 외쳐대며 선거운동에 열심이었다.

적어도 어린 나에게 있어 그 후보자가 면의원에 당선되면 우리 마을은 금방 부자 마을이 될 것이고 그 면의원은 우리와 같이 지게를 지고 다니는 농군 신세를 면하게 돼서 항상 양복에 구두를 신고 다니는 아주 높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것이다.

말하자면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아이에게는 그 당시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는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며 특권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포부이기도 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우리 마을 이장은 면의원에 당선되었고, 온 마을 사람들의 들뜬 축하행사도 끝이 났다.

그런데 며칠 후 나는 차마 마주치지 말았어야 할 상황을 보게 되었다. 그때쯤 근사한 양복에 구두를 신고 다녀야 할 면의원님께서 면의원이 되기 전의 평상시 모습대로 삼베바지 가랑이를 반쯤 접어 올리고 웃통의 단추는 다 열어젖힌 차림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풀지게를 지고 산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위풍당당해야 할 면의원님께서 쩨쩨하게 풀지게를 지다니, 면의원이 돼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꿈이 깨져버린 어린 아이는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고 그 못난 면의원을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는 30여 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그 동안 많은 의원님들,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군의원까지 많은 의원님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중 일부는 그분들이 잘못돼서 법의 심판을 받는 장면에서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분들 대게는 입으로는 조국과 민족, 자유와 인권,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양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잇속을 챙기기에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위세는 당당했고 의원님이 되기 전과는 전혀 다른 언행을 연출하기에 능숙했다. 이런 분들이야 말로 내가 코흘리개 시절에 동경했던 높은 분들의 모습에 딱 부합하는 그런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공직을 다 마치고 어느 정도 철이 들고 보니 이제는 그 옛날에 나의 꿈을 산산조각 내버렸던 풀지게를 진 쩨쩨한 면의원님이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치기 섞인 단순한 향수일까? 오는 6월에 치러지는 지방자치단체 선거 후에, 당선되기 전 순수한 그 모습 그대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풀지게를 진 면의원님 같은 도의원, 시의원, 군의원님들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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